개나리, 목련,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나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이렇게 꽃이 피고, 봄바람이 부는 자리에 ‘그리움’이란 감정은 강렬해진다. 어쩌면 겨울과 함께 얼어있던 그리움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아름답고 멋진 장소를 만나 희열에 떨게 하리라. 그냥 그 풍경을 바라봄으로써 응어리진 아픔이 나을 수 있으리. 김종삼 시인의 시 ‘어부’를 읊으며 고된 오늘을 위로할 수도….
바닷가에 매어둔/작은 고깃배/날마다 출렁거린다/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멀리서 노를 저어 나가서/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중얼거리려고//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사노라면/많은 기쁨이 된다고
‘화사한 날을 기다리며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는 대목을 끌어안으면 모든 괴로움이 녹아내릴 것 같다.
얼마 전 후배들과 이런 얘길 나누었다. 다음 세상에도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어디서 태어나고 싶은가? 두 친구가 각각 영국과 캐나다를 선택했을 때 그래도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사르트르가 자신의 소설 ‘구토’에서 그랬던가. 어디에 살든 열흘만 있으면 다 똑같다고. 이에 깊은 공감을 한다. 그리고 외국 여행을 몇 군데 가보지 못했으나, 크게 깨달은 점 하나는 우리나라도 참 근사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너무 익숙해서 제대로 못 본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우리 풍경의 스케일은 대체로 작고 아담하지만 소탈하고, 고졸 담백한 아름다움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자부한다.
지난 해 봄부터 올해 2월까지 우리나라 박물관 기행을 하면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새삼 가슴이 뿌듯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 것은 천시하고 남의 것만 좇는 건 아닐까?
마치 세계화를 서구화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 문화가 세계적인 것이 되기 위한 첫 발걸음은 우리 것을 제대로 아는 일이다. ‘가장 문화적인 공간’인 박물관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힘차게 발전할 것이다. 예술문화가 관광상품이 되어버린 이상 수많은 여행객을 부르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테니 말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벚꽃잎 펄펄 날리고, 은은한 풀 냄새를 맡으며 우리 땅이 지닌 아늑함에 빠져들었다. 흙문화의 산물인 우리 건축과 풍광. 흙에서 배어 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 추억을 부르고, 몸은 촉촉이 젖어갔다. 많은 박물관은 이렇게 흙이 있는 자리에 위치해 있어서 뭔가 내게서 빠져나갔던 감각이 되돌아왔다. 거기다 우리 조상의 높은 미의식을 보여준 현대보다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유물들. 그야말로 상상력이 충만하고 예술적 감성이 예민해지는 보물창고였다. 예술적 감성은 예술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누구에게나 필요한 약이다. 삶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나, 행복감을 되찾게 하는 보약과도 같은 것. 박물관은 역사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 가는 유산을 담은 시간창고인 셈이다.
교육이민이니 뭐니 하며 이 땅을 떠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요즘. 휴일이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아이들과 함께 떠나 본 부모님은 얼마나 될까. 주말이면 산과 들에서 고기나 구워 먹고 놀고, 경제 불황이라고 하여 우왕좌왕할 뿐 정작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건 아닐까. 초고속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한국인만큼 많이 사용하는 나라도 드물다고 한다. 탐구하지 않고 책을 읽지 않는 풍토에서 상상력이 충만하고 제대로 된 문화가 꽃을 피울 리 없고, 나라경제 또한 불황을 빨리 이겨내기 힘들다.
내가 머문 곳에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내 혼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을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
부드러운 바람처럼 향기롭거나 내가 왜 살아있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해주는 책과 영혼의 먹을거리를 소중히 해야 하리라.
나는 보름 후면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에게 우리나라가 근사한 나라임을 보여주고 싶다. 좋은 책들을 읽어주고, 미술관과 박물관 태교를 했던 곳을 다시 찾고, 함께 이 땅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간직하고 싶다.
바로 나에겐 그 날이 그렇게 기다리던 화사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