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슈팅 게임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공포를 만났다. 게임을 시작하면 낯선 세계와 끔찍한 적들이 곧장 코앞으로 들이닥친다. 여기에 사정없이 튀는 피와 살점까지 덧붙여지고 공포감은 극에 이르렀다.
이 놀라운 공포의 세계는 즉각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엄청나게 쏟아진 일인칭 슈팅 게임들은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더 강하고 다양한 무기, 그리고 더 생생한 폭력을 도입했다. 리얼리티를 높인다는 명목 아래 몸은 더 정교하게 토막이 나고 자연스럽게 터졌다.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시장을 장악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해결책을 제시한 게 ‘퀘이크 3 아레나’다.
‘퀘이크 3 아레나’는 일인칭 슈팅 게임의 왕자 ‘퀘이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은하계 최고의 전사들이 모여 최강의 자리를 놓고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전투장이 3편의 무대다. 이름 값에 걸맞게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폭력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총탄과 로켓에 자칫하면 몸이 걸래가 된다. 제대로 맞으면 단 한 방으로 머리가 산산조각 나기도 한다. 저걸 누가 다 닦나 하는 걱정이 될 정도로 사방에 피가 튀는 것도 시리즈의 전통에 충실하다. 그러나 이 게임은 하나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공포는 고립된 마음에서 비롯된다. 모든 일인칭 슈팅 게임은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 낯선 세계, 모르는 적들. 왜 싸워야 하는 지도 불분명한 채 단지 살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 ‘퀘이크 3’는 다르다. 이 게임에서 싸움은 시합이다.
내가 죽어 산산조각이 나고, 상대방이 죽어 피가 튀지만 그래도 시합일 뿐이다. 적은 경쟁자다. 이기기 위해선 죽여야 한다. 우승은 그 많은 폭력의 충분한 이유다.
기습을 당해 내가 죽더라도 그건 1점을 먼저 빼앗긴 섭섭함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 공포는 승부를 둘러싸고 느껴지는 긴장감으로 대체된다. 죽음은 네트를 가르는 공처럼 가벼워졌다. 확장팩인 ‘퀘이크 3 팀 아레나’처럼 여럿이 편을 짜 네트워크 플레이를 한다면 이런 느낌이 더 강하다.
‘퀘이크 3 아레나’의 폭력은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서 농구 골대에 새겨놓은 덩크슛 마크 이상이 아니게 된다. 그저 즐거운 농담, 너 한 번 죽고 나 한 번 죽고, ‘게임’에서 ‘우승’하기 위해 주고받는 탁구공이 된 것이다. 놀라운 발상의 전환 덕분에 ‘퀘이크’는 공포 게임에서 스포츠 게임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이 전환은 대단히 독창적이지는 않다. 이미 오래 전 CNN을 통해 본 ‘이라크 공습’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스포츠 중계처럼 지켜본 바 있으니 말이다.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