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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엔터! 문화현장:'입맞춤'의 도사들, 외화 더빙 현장

입력 | 2001-04-10 18:38:00


‘입 맞추는 곳’은 생각보다 분위기가 썰렁했다. TV 두 대, 마이크가 세 개, 그리고 책상위에 놓인 헤드폰 세트 열 개….

9일 오후 2시, SBS ‘영화특급’ 더빙 현장. 두터운 방음문이 달린 녹음실 벽쪽에 14명의 성우들이 앉아 있었다.

“오늘은 몇시쯤 끝나려나.”

“참, 전화 발신자 서비스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목소리만 듣고 있으면 흡사 할리우드의 어느 사교 모임에 와 있는 듯 했다. ‘알 파치노’부터 ‘맥 라이언’까지 해외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한 때 인기를 끌었던 만화 주인공 ‘호호 아줌마’의 목소리도 들렸다.

“자, 가겠습니다”

녹음실 스피커를 통해 담당 김하정 P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더빙 작품은 . 마이클 더글러스와 기네스 팰트로가 부부로 나오는 서스펜스 스릴러다. 98년 작품이니 ‘안방극장’의 상영작치고는 비교적 최신작이다.

스튜디오 방음창 위에 달린 ‘방송중’이라는 글자에 빨간 불이 켜졌다.

“(한숨) 당신 정말 매혹적이야.”

“(웃음) 네, 하지만 시간이 없어요.”

박일씨의 묵직한 마이클 더글러스 목소리와 송도영씨의 깔끔한 기네스 팰트로의 목소리가 TV 화면속 영화장면에 겹쳐진다.

음악이나 효과음은 별도로 녹음된 원본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더빙할 때는 배경음 없이 대사만 녹음한다. 성우들은 대본을 손에 든 채 한쪽 눈으로 화면을 흘깃흘깃 보며 ‘입을 맞췄다’. 자리에 앉아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발끝으로 살금살금 마이크앞으로 걸어와 대사를 녹음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방송중’ 표시에 불이 꺼졌다. “목소리 좀 확인해 봅시다” PD가 말하자 감긴 화면에서 방금 녹음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에밀리는 좀 더 어리게 가주세요.”

PD의 요구에 송도영씨가 금새 더 젊어진 목소리로 “한 살만 더 어려질까봐.” 했다.

영화속 등장 인물은 모두 59명. 이중 주인공인 세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56명의 등장인물들을 11명의 성우가 나눠서 맡는다. 앞에서 전화 교환원을 맡은 사람이 비서나 열차 안내원의 목소리를 또 맡는 식이다.

다시 녹음이 시작됐다. 빨간불이 들어오면 금새 조용해지고 불이 꺼지면 다들 일제히 ‘흠흠’‘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가끔씩 한쪽 눈으로 흘깃 쳐다볼 뿐 화면을 거의 쳐다보지 않는데도 배우와 성우의 ‘입맞춤’은 완벽했다.

거듭 감탄하며 신기해하자 마이클 더글러스를 맡은 성우 박일씨가 한마디 던진다. “아니, 타이피스트가 자판보면서 타자치는 거 봤어요?”

화면에서 불륜의 사랑에 빠진 에밀리와 연인 데이빗의 진한 키스 신이 이어졌다.

송도영씨가 나지막하게 ‘으응∼’ 소리를 냈다.

대본을 보니 ‘에밀리 : (신음 &호흡 계속)’로 돼 있다. 순간 NG.

데이빗 역을 맡은 오인성씨가 키스 도중 나오는 대사인 “왜 이렇게 예쁜거야” 를 빠뜨린 것. 오인성씨는 멋쩍은 듯 “이런 건 안 해 봐서….” 했다.

이미 오전에 모여 영화를 보면서 리허설을 끝낸 탓인지 별다른 실수 없이 녹음이 진행됐다. 화면과 대사의 양이 안 맞으면 PD와 성우가 즉석에서 말을 넣거나 뺐다.

목소리 연기지만 감정에 몰입하다 보면 표정이나 손짓이 절로 따라나온다. 기네스 팰트로가 살인청부업자에게 목을 졸리는 장면에서 송도영씨는 “아악!” “헉” 하고 비명을 지르며 실제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괴로워했고, 목에는 핏줄이 섰다.

김 PD는 “영화 한편을 새로 찍는 거나 다름없다”며 “단순히 입모양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담아내는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더빙은 최소한 10년 이상 경력이 된 성우들이 맡는다” 고 했다.

오후 5시40분. 1시간 40분짜리 영화 한편의 더빙작업은 3시간만에 끝났다.








▼박스: "배우-성우도 찰떡 궁합 있어요."

외국 배우와 국내 성우도 ‘찰떡궁합’이 있다.

멜 깁슨은 양지운, 더스틴 호프만은 배한성씨의 목소리가 먼저 떠오를 정도다. 저우룬파(주윤발)와 스티븐 시걸 등 ‘액션 스타’는 신성호씨가 맡아왔다.

리처드 기어, 아놀드 슈워츠네거, 브루스 윌리스, 실베스타 스탤론 등은 서로 다른 개성을 자랑하는 해외 스타들이지만 ‘안방 극장’의 목소리 만큼은 모두 똑같다. 이들은 거의 100% 이정구씨가 전담한다.

마이클 더글러스, 알 파치노, 클린트 이스트우드, 알랑 들롱, 말론 브란도 목소리는 성우는 박일씨가 ‘임자’.

여배우의 줄리아 로버츠와 샤론 스톤은 강희선씨가, 홍콩 배우 장만위는 문지현씨, 킴 베신저는 송도영씨로 특화돼 있다.

맥 라이언, 카메론 디아즈는 방송사마다 목소리가 다르다. 브래드 피트나 러셀 크로 등 젊은 스타의 목소리는 아직 ‘무주공산’.

탤런트의 경우 출연료 등급이 18등급으로 나뉘지만 더빙 성우는 경력 10년을 기준으로 A, B 두 등급뿐이다. 성우의 출연료는 A급의 경우 편당 50만원 정도다. 다만 주요 배역을 맡은 성우는 ‘주연 수당’ 10만원이 더 붙는다.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