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예리의 만화에는 힘이 있다. 여성작가답지 않은 굵은 선과 거침없는 데생은 독자를 사로잡는 힘의 원천이다. 세세한 칸의 분할보다 시원한 분할을 선호해 칸과 칸, 그리고 페이지와 페이지를 통해 빠른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많아야 4칸, 보통 3칸, 2칸으로 끝나는 나예리 식 페이지 구성은 쉽게 허점이 노출될 수 있지만 다양한 앵글의 사용으로 이를 상쇄한다. 또 시원하게 구획된 칸은 캐릭터 특유의 카리스마를 뿜어내는데 매우 효율적이다.
‘글로리 에이지’는 어떤 작품보다 나예리의 힘이 충분히 발휘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땅을 선택한 천사, 힘을 소유하고 싶은 천사, 그리고 천사와 인간의 혼혈인 ‘네피림’을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의 구도를 뼈대로 하고 있다.
가장 하급천사인 썬더와 파누엘은 영혼을 거두러온 곳에서 우연히 자신들을 알아보는 아이 새비언을 만난다. 새비언이 천사를 알아 본 것은 그 자신이 천사와 사람의 혼혈인 네피림이었기 때문.
더구나 새비언은 네피림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힘을 지닌 천사와 네피림의 자손인 네피림 2세였다. 이전에 출현한 네피림 2세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할 정도로 가공할 힘을 지닌 존재였다. 썬더는 자신이 네피림 2세인 줄 모르는 새비언을 각성시켜 그 힘을 소유하려고 하지만, 악마인 자로비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 작품은 네피림 2세인 새비언과 그를 발견한 썬더, 그리고 스스로 천사의 직분을 내던진 에밀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강한 힘과 카리스마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섬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건과 사건이 빚어내는 일상의 흐름을 통해 감정의 변화를 치밀하게 그려낸다.
나예리 만화의 궁극적인 힘은 감정이 변하는 골짜기에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깊은 골짜기에 피어나는 안개처럼 소리 없이 독자를 감염시킨다.
비례에도 맞지 않는 엉터리 근육의 남자가 터무니없는 주먹 대결을 벌인다든지 황당한 필살기를 남발해야 힘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 작가들의 만화와 비교하면, 나예리의 만화는 무엇이 힘을 만들어 내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힘은 남성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예리 만화, 더 나아가 여성 작가들의 만화에 대한 편견이 나예리의 힘을 즐기는데 방해가 된다. 마음의 빗장을 열면 나예리 만화가 갖고 있는 힘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다.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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