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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봉칼럼]'제왕적 권력'의 약화

입력 | 2001-04-18 18:51:00


얼마 전에 여당의 어느 고위인사가 대통령의 권력을 가리켜 '제왕적'(帝王的)이라고 표현한 일이 있었다.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통령이 행사하는 지배권력의 막강함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해도 별로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 중반을 넘기면서, 강한 정부 를 표방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는 생각을 헷갈리게 한다. 제왕적 권력도 모자라서 그 이상의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제왕적 권력에 아직 못미치고 있어서 지배력을 좀 더 강화해야 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실적으로는 제왕적 지배의 현실적 결과가 제왕적 지배 의도에 비춰볼 때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것은 야당 총재를 만난 자리에서 김대통령이 언급한 한 마디에서 잘 나타난다. 김대통령은 "나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것이냐"고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노출시켰다. 이 말은 휘하의 정부나 여당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정치가 투쟁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대통령으로서, 야당 총재에게까지 복종을 요구한 듯한 인상을 주는 이 발언은 전혀 냉소적으로 이해할 일은 아닌성 싶다. 뜻대로 세상이 따라주지 않는 데 대한 불편함을 토로한 것이리라고 여겨진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정말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외로운 자리다. 권력을 집중적으로 행사할수록 그 외로움의 강도를 더 짙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자리다. 대통령 다음 위치에 헌법상 국회의장도 있고 국무총리도 있지만, 지금의 권력행사 양태에서 그들이 갖는 정치적 비중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이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이 직선제 하에서는 남들과는 다른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의미의 카리스마를 선전하고 대중의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대통령 자리에 이르게 되는데, 일단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그 카리스마가 만들어 낸 기대를 현실적으로 충족시켜 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 대통령의 경우도 초기에는 범지역적으로 지지도(支持度)가 높다가 요사이에는 자꾸만 내려가는 추세가 바로 그런 점을 말해 준다. 수많은 사람을 거느리면서도 이렇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한가지만 고른다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신념을 포기해야 하는 관료와는 달리, 신념을 유지하기 위해 자리를 희생해야 하는 정치인을 주변에 두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은 왕왕 합리성을 결여하게 되고 권력장치에 미치는 영향은 무게를 잃게 된다. 따라서 제왕적 권력도 약화되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되고 절대적 책임만 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분석의 시각에서 '강한 정부'를 외친 김대통령의 주장을 이해한다면, 무엇이 권력의 현실적 약화를 가져왔을까 하는 의문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시민생활의 차원에서는 경제정책의 실패에 기인한다. 일각에서는 미국 주도의 신경제 체제의 적용에 원인이 있다고 보지만, 신경제를 운운하기 전에 한국경제는 그 체제가 어떻게 규정되든지간에 현대경제에 필요한 합리성이 결여돼 있었던 것이 문제였는데, 이 기본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등한히한 것이 지금의 상황을 초래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남북문제에 대한 접근이 잘못됐다는 데 있다.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은, 평화를 확보하려면 군사면을 먼저 고려했어야 했다. 기상적(假想敵)의 개념까지 흔들어 놓은 것이 그 동안의 정책이었다면, 세계적 군사긴장지역인 한반도의 성격을 너무 안이하게 파악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바로 권력의 정당성에 연관되는 신뢰문제이다. 대통령이나 정부가 권위를 갖고 말하는 것은 믿어보려는 것이 국민의 심성인데,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가 없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정부의 정책기획 능력의 총체적 부족에서 오는 바가 큰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원인들을 종합해 나오는 말이 총체적 위기라는 표현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것이 과장이든 아니든 문제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원점으로 돌아가서 현실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노재봉(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