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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모였다"

입력 | 2001-04-20 18:00:00


4월18일 서울 역삼동 L.G 아트센터에선 때아닌 공연이 열렸다. '미친 척 하는' 햄릿이 아버지를 죽인 삼촌 클로디어스에게 복수를 준비하는 장면이다. 삼촌이 마셔야 할 독주를 대신 들이킨 왕비는 처절하게 쓰러져 있고 햄릿은 삼촌이자 양아버지인 클로디어스의 배에 칼을 꽂는다.

"처절한 운명의 장난이여-" 햄릿의 절규가 가슴을 쓰리게 하지만 어찌된 일이지 좀처럼 그 이상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다시 그 장면 또 그 장면. 이야기를 들어보니 촬영을 시작한 지 10시간이 지난 공연이 '그 모양'이란다.

진도도 잘 안 나가는, 소리 소문 없이 벌어진 공연엔 의외로 관람객도 많다. 앉아있는 것 자체가 '고역'인 이 길고 지루한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알고 보니 엑스트라들. 개중엔 공연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섭외 된 러시아 엑스트라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는 네 명의 킬러와 그들을 쫓는 검사의 엉뚱한 접전을 다룬 블랙 코미디. '킬러'하면 흔히 연상되는 거만한 분위기는 그들 누구에게도 없다.

일거리를 '따오는' 일명 영업 사원 격의 상연(신현준), 말수가 적은 대신 기계 다루는 일에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상연의 친동생 하연(원빈), 다혈질이지만 임산부나 아이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따뜻한 킬러 정우(신하균), 누군가를 죽이고 난 후엔 반드시 고해성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팀의 저격수 재영(정재영). 이들 네 명의 킬러는 킬러라기보다 세상의 악을 청소하는 '인간 클리너'나 다름없다.

"왼손을 저격해 달라"고 하면 정확히 왼손을 저격해주고 "몇월며칠 몇시에 죽여달라"고 하면 반드시 그 시간에 누군가를 없애주는 프로페셔널 킬러.

"의뢰인이 없어 킬러들이 굶어죽게 될 날"이 있을 거라고, "그게 바로 내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큰소리 뻥뻥 치는 조검사(정진영)도 어느 정도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세상엔 누군가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고, 대신 그 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그의 깨달음(?)은 이 영화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날 촬영은 의 하이라이트. '모닝 뉴스'의 앵커 오영란(고은미)의 사주를 받은 네 명의 킬러들이 공연장에 있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한 데 모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오늘 죽여야 할 타깃은 과연 누구일까. "문광부 장관인가, 아니면 김광팔 의원? 그것도 아니면 최무식 의원?" 조검사는 연신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데 한 가지 의미심장한 단서가 있다. 포스터에 담긴 카피 문구 "햄릿...그도 죽는다."

이날 촬영장엔 킬러들의 동향을 눈치채고 출동한 조 검사와 경찰, 현장 스탭, 엑스트라 등을 포함해 꽤 많은 인원이 연극 관람 이외의 '볼 일'을 위해 이 극장에 모였다. 그러나 정작 객석 안에 분명 앉아 있어야 할 영화의 주인공 '킬러들'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배우들은 다 어디 숨어있는 거야." 이 영화에서 막내 킬러 하연 역을 맡고 있는 원빈은 기다리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원빈에게 줄 보약을 싸가지고 온 팬들이 오후 내내 현장을 떠나지 않고 그를 기다렸기 때문. 옆에 있던 스탭들은 "내가 '빈'해보이지 않냐"는 중의적인 표현으로 보약 뺏기에 열중했지만 정작 원빈은 "보약 선물 많이 받아봤다"며 심드렁한 모습을 보였다.

과연 현장은 스타들이 운집한 영화답다. 감독 자신도 이른 나이에 천재 대접 받으며 충무로와 대학로를 휘젓고 다니는 스타 감독이고, TV 스타에서 영화배우로 전업한 원빈, 'JSA'로 완전히 떠버린 신하균, 등에 출연하며 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과시중인 신현준, 의 의리파 건달을 연기해 주가를 높인 정진영 등이 매 현장마다 출동해 분위기를 띄웠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주연배우들이 100% 참석률을 보이는 현장은 제목처럼 '수다'가 넘쳐나는 분위기다. 이 중 대장 역을 떠맡은 인물은 단연 신현준. 영화 속에서도 킬러들의 리더 역할을 맡고 있는 신현준은 뜻밖에도 후배들의 '기'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드러운 성격의 신현준이 '얼차례'를 줄 리는 만무한 일. 촬영이 없는 날에도 현장에 와서 함께 놀자며 배우들을 부추겼다는 뜻이다.

맨발로 정신 없이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장진 감독과는 달리 이날 따라 '한가한' 배우들은 분장실에서 수다 떠는 일에만 전념했다. 스탠바이 상태로 기다리기를 몇 시간. 이날 촬영이 있었던 배우는 조 검사 역의 정진영, 저격 담당 킬러 재영 역의 정재영뿐이다.

정진영은 총으로 무장한 채 객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신을 연기했고 정재영은 2층에서 긴 총을 옆에 끼고 누군가를 겨냥하는 신을 연기했다. 할 일 없이 촬영장을 누빈 원빈 신하균 신현준은 간혹 지루해할 법도 하건만 '킬러들의 수다'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풍경이다.

도저히 킬러영화라곤 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 발랄한 대사, 36년간 '눈물샘'이란 게 있는 줄도 모른 채 살았던 남자의 아름다운 감성까지 담고있는 코미디 촬영현장. 아침 7시부터 시작된 이 영화의 촬영은 자정을 넘어서까지 계속됐고 L.G 아트센터의 창문엔 따뜻한 봄햇살 대신 샹들리에 불빛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현재 30%의 촬영이 진행된 는 하이라이트신 촬영을 마치고 킬러들의 아지트가 준비된 양수리 세트장으로 촬영지를 옮길 예정. 총 2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는 6월 총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을 거쳐 8월 개봉된다.

황희연benot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