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부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권유하겠다’는 표현을 부쩍 많이 쓰고 있다.
정부와 민주당은 18일 당정 협의를 통해 연체금을 갚는 즉시 불량 기록이 삭제되는 소액 신용불량자의 범위를 상향 조정해 99만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자를 구제하도록 권유하겠다고 밝혔다. 금융감독위는 최근 대통령 업무 보고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신용우량업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신용대출을 해주도록 금융기관에 권유하겠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이 자발적으로 회계감사를 받을 경우 신용대출에서 우대받도록 하겠다는 발표도 있었다. 정부의 ‘희망 표시’ 이상의 효력을 기대하기 힘든 권유들이다.
‘권유의 강도’가 너무 세서 말썽을 빚는 경우도 잦다.
지난해말 현대전자의 자금 흐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금융감독원은 채권은행단을 소집해 수출환어음(D/A)한도를 늘릴 것을 권유했다. 14억달러였던 한도를 채권단이 축소 운용함에 따라 현대전자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한 것. 두세 차례의 소집 회의에도 은행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지난달에서야 가까스로 13억달러 수준으로 한도가 확대됐다. 반면 이같은 억지 권유에 대해 은행들은 현대전자의 기한부신용장(USANCE) 한도를 축소하는 방법으로 반발하고 있다.
현대건설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시행한 아파트분양 담보 대출도 정부는 채권은행단이 4000억원 한도에서 융자를 해주도록 권유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시행 초기 주택, 신한 은행만 참여했을 뿐 대부분 금융기관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이밖에도 국민―주택은행 합병도 시한에 얽매인 정부의 강권에 따라 황급히 이뤄져 졸속비난과 함께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고, 현대건설 출자 전환도 은행단의 충분한 의견 조율 없이 정부가 주도함에 따라 은행간에 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H은행 고위 간부는 “예전의 ‘지시’나 ‘창구 지도’보다는 강도가 약해졌지만 현실성이 없는 방안이 권유라는 이름으로 남발되는 경향이 있다”며 “은행을 정부가 시키면 집행하는‘대리점’쯤으로 생각하는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S은행 관계자는 “이런 일을 보면 금융 개혁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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