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 (一喜一悲). 사전적 의미로는 ‘기쁜 일과 슬픈 일이 번갈아 일어난다’는 뜻으로 인생 철학을 얘기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러나 이 격언은 스포츠계, 특히 축구판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언론의 ‘냄비 근성’을 질타할 때 주로 쓰는 말도, 초라한 성적을 낸 감독이 팬들에게 침착할 것을 당부할 때 인용하는 말도 어김없이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난 4월2일 ‘제2기 히딩크 사단’에 합류할 대표팀 명단이 발표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에서 멋진 선취골을 기록한 후 퇴장당해 통한의 역전패를 자초했던 하석주(포항)가 합류했고, 노장 황선홍(가시와 레이솔)의 이름도 다시 보인다. 네티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유상철(가시와 레이솔)은 부상으로 빠졌고, ‘젊은 피’ 심재원(부산 아이콘스)도 결국 탈락했다.
이쯤 되면 일희일비란 말이 다시 한번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히딩크 사단에 합류해 태극마크를 단 것이 선수로서 영광인 것은 분명하지만 무턱대고 좋아할 일만은 아니고, 또 떨어졌다고 해서 그렇게 슬퍼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선수를 보는 시각은 감독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두바이 4개국 친선축구대회 때 벤치에 앉아 있는 박진섭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요즘 들어 그라운드에서 통 안 보이네요?” 그러자 그는 “저, 어쩌면 영원히 대표팀에서 못 뛸지도 몰라요. 히딩크 감독이 저 같은 스타일은 마음에 안 드나봐요”라며 고개를 떨궜다. 허정무 감독 시절 ‘좌영표 우진섭’이란 신조어를 낳으며 상한가를 달리던 박진섭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박진섭을 외면한 것은 그의 ‘엉거주춤한’ 달리기 폼과 왜소한 체격 때문이었다. 당시 체격과 체력이 월등한 심재원이 박진섭 자리에서 줄곧 뛴 것에서 히딩크 감독의 이러한 선수기용 스타일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심재원의 기쁨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지난 3월 개막한 프로축구 아디다스컵 대회 때 한계를 드러내며 주저앉았던 것. 히딩크 감독은 이미 지난 2월 두바이 대회의 마지막 경기인 덴마크 전 때, 끓어오르는 국내의 비난 여론을 의식해 그를 출전시키지 않은 바 있다. 이후 국내 프로축구 경기를 면밀히 관찰한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체력과 근성이 아쉽지만 키워서 활용하기에는 시간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22명 중 13명 180cm 이상 장신
대표팀 새내기 서덕규(울산)는 홍명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테스트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송종국(부산)처럼 ‘깜짝 신데렐라’로 뜰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명단 발표 때 기자단도 깜짝 놀란 의외의 인물 서덕규는 지난 1월 대표팀과의 연습 경기 때 보인 근성과 성실성으로 히딩크 감독의 주목을 받았다. 서덕규를 김영근(대전), 김한윤(부천) 등과 함께 마지막까지 저울질한 히딩크 감독의 최종결심은 11일 울산-대전전을 보고 나서 이루어진 것. 그러나 사실 이날 경기는 울산이 엉성한 수비로 대전에 4골을 내주며 영패를 당한 졸전이었다. 그럼에도 과감히 서덕규를 발탁한 것에서 ‘성실성’을 무엇보다 높게 평가하는 히딩크 감독의 선수 평가 기준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설명은 이임생(부천)의 재선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임생은 두바이 대회 내내 벤치 신세를 져야만 했고,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붕대 투혼’의 주인공 이임생은 실전을 방불하게 하는 플레이로 훈련에 참여했고, 이를 통해 히딩크 감독에게 누구 못지 않은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때마침 홍명보가 부상으로 빠진 것이 이임생에게 한 번 더 재기의 기회를 갖게 해준 천우신조가 된 셈이기도 하다.
이번 2기 대표팀 선발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월드컵 때 만 34세가 되는 노장 황선홍의 복귀.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을 당해 ‘밥 값’도 제대로 못했던 그는 이후 태극마크의 꿈을 접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거친 수비가 덜한 일본의 프로축구 무대가 그를 살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히딩크 감독은 “나이가 들어도 체력이나 정신력에서 문제가 없다면 얼마든지 뛸 수 있다”며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김도훈의 플레이에 100% 만족하지 못하는 히딩크 감독으로선 ‘명성이 자자한’ 황선홍을 일단 한 번 테스트해 보자는 계산이다.
이동국(브레멘), 설기현(앤트워프), 안정환(페루자) 등 유럽파의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먼저 설기현. 그는 지난 2월11일 UAE전을 앞둔 오전 느닷없이 히딩크 감독의 방에 불려갔다. “어젯밤 늦게 도착했는데 뛸 수 있겠느냐. 정 피로하면 안 뛰어도 된다.” 넌지시 던진 감독의 질문에 설기현은 “9일 풀 경기를 뛰어 피로가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30분 정도는 문제없다”고 듬직하게 답했고, 더욱이 이날 경기에서 골까지 성공시켰다. 크게 만족한 히딩크 감독이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은 불문가지. “설기현이 합류해 너무 기뻤다. 그는 강하고 빠르다. 나와 팀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플레이할 줄 아는 선수다.”
월드컵 목표 ‘숨은 진주 찾기’ 계속
반면 두바이 합류과정에서부터 불협화음을 낸 안정환이 결정적으로 히딩크 감독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마지막 덴마크 전에서의 ‘나홀로 플레이’ 때문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의 탈락 이유를 설명하면서 “너무 오랫동안 벤치 신세를 져 몸이 풀어졌고, 정신적으로도 나약해져 있다. 앞으로도 유럽에 진출하는 선수는 명문팀에 가서 벤치 신세만 지기보다는 다소 약한 팀에서 꾸준히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게 중요하다”며 따끔한 일침을 놓기도 했다.
이동국의 경우는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에서 무릎 치료를 받는 동안 핌 베어벡 코치가 독일 브레멘까지 찾아가 직접 플레이를 체크했다. 결론은 만족스러운 수준이라는 후문. 히딩크 감독은 “이동국의 기량을 확인하고 그를 최대한 활용할 방안을 찾아보겠다”며 높은 기대감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이번 대표팀 개편의 포인트는 뭐니뭐니해도 8명 중 절반이 바뀐 수비라인이다. 부상과 팀 사정으로 빠진 홍명보(가시와 레이솔)와 김병지(포항)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강철과 최성용(이상 라스크 린츠)이 새로 합류했고, 서덕규, GK 최은성(대전)이 대표팀에 처음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미드필드에는 의외로 체격과 체력은 떨어지지만 패싱력이 좋은 윤정환(세레소 오사카)이 자리를 꿰찬 것 또한 눈길을 끈다.
또 한 가지 주의할 대목은 절반이 넘는 13명의 선수가 180cm 이상 장신이라는 점이다. 유럽팀만 만나면 주눅이 드는 한국 대표팀을 이해할 수 없다는 히딩크 감독으로선 일단 체격면에서라도 유럽팀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이 가졌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기라성 같은 선수가 즐비한 유럽 명문 클럽 감독을 역임한 히딩크 감독으로선 이렇게 선수들을 뽑아놓고도 누구 하나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부족한 재료로 어떤 요리를 만들어내야 할지 고심하는 요리사의 고뇌다. 이미 선수명단을 발표한 15일에도 코치들이 프로 경기장에 나가 ‘숨은 진주 찾기’에 몰두하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대표팀 명단을 발표하면서 “최종 목표는 월드컵이고, 그때까지는 모든 것이 과정이란 점을 이해해달라”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에 따라 선수들은 물론 대표팀 성적에 따른 국내 축구 팬의 희비도 계속해서 엇갈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전망이다. 섣불리 ‘일희일비’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