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가을인가, ‘눈물’ 준비 작업에 들어가면서 꽤 바빴던 어느날, 괴이한(!) 전갈 하나를 받았다. CNN 홍콩 지사에서 온 연락인데,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관련해 홍콩 스튜디오에서 미국 애틀랜타 시티에 있는 본사를 연결해 나를 생방송으로 인터뷰하고 싶다는 거였다.
이게 뭐야? 혹시 그 때 한창 뜨고 있던 존 우(오우삼) 감독에게 갈 연락이 잘못 온 거 아냐? 하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난 바쁘다고 거절했다. 다시 세세한 제안이 날아왔다. 왕복 항공권에 리무진 서비스, 그리고 리츠 칼튼의 이그제큐티브 룸을 제공하겠다는 거였다. 놓치고 싶지 않을 경험이 될 거라나.
어쨌든 딴 사람한테 갈 연락이 나에게 잘못 온 게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도대체 내 영화를 언제 보았다고 이러는 거야? 가봤자 10분도 안 되는 짧은 인터뷰일텐데 고고한 척 짤라야 하는 거 아냐? 그래도 CNN 인데? 도대체 CNN이 뭔데? 등등.
결국 난 내 돈으로 비행기 표 하나를 더 구입해 아내와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그 때 아내는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약간의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턱없이 바쁜 척하는 나와는 꽤 긴 냉전 중이었고. 아내는 뭐라고 쫑알거리면서도 따라왔다.
우리는 전망 좋은 그럴 듯한 방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왔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근처 번화가안에서 발견한 작은 태국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 겸 낮술을 마셨다. 아내는 술을 많이 마셨고, 많이 마신 만큼 많이 떠들어댔다.
난 겸손한 척 조용히 듣기만 했고. 착한 아내의 우울증과 나에 대한 불만이 어느새 봄눈 녹듯이 녹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호텔로 돌아와 취한 아내가 잠들었을 무렵 CNN측에서 연락이 왔다.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겠다는 거였다.
예상대로 인터뷰는 시시했다. 영화를 안 봤을 게 뻔한 앵커는 그저 그런 질문을 읽고 있었고, 난 나대로 낮에 먹은 술과 생방송이 주는 긴장감 때문에 우물거렸고, 동시통역을 해주는 분은 우물거리는 나 때문에 난처해했다.
그 중에서 가장 너절한 질문은 이런 거였다. 자기(서양인)가 알기에 한국은 성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이고, 특히 한국의 여성들은 성적으로 대단히 소극적인데, 어떻게 이런 영화를 찍게 되었냐? 운운.
이것 보세요, 어리석은 소리 작작해요. 당신이 하고 느끼는 만큼 우리도 하고 느껴요, 그건 지구 어디의 누구라도 마찬가지라구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런 뜻으로 정중하게 얘기하려고 난 좀 더 우물거려야 했다.
그래도 CNN이여, 고맙다. 심각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 결혼 생활의 위기를 가볍게 해소시켜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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