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초파일이 신록이 번지는 오월의 첫날이라서 더욱 좋다. 숲의 그늘이 깊어지고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계절이 바로 오월이다.
또 뜰에 피어나는 불두화 향기는 어떠한가. 봄꽃이 시샘이라도 하듯 피었다면 오월의 꽃은 수행자처럼 청빈하다. 뒷산의 숲은 파릇파릇 생기가 돌고 색깔은 온통 연둣빛 채색이다.
만약 부처님이 이 아름다운 오월에 오시지 않았다면 봉축의 기쁨은 반감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집 생일 잔치가 초파일만큼 분주하고 사람을 들뜨게 할 수 있을까. 메마른 세정(世情)에도 등불을 켜는 정성은 어느 불빛보다 환하기만 하다. 초파일은 할머니와 아이들의 합장한 손길에서 차별이 없는 불심을 만나는 날이다.
▼마음이 주인되면 모두가 이웃▼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기억하고 축복하는 것은 단순히 한 인간의 탄생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밝은 길을 열어준 원년(元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 양식과 인간의 길을 보여준 여래(如來)가 오셨다는 뜻이다. 여래가 진리를 전하는 포교사로 중생 곁에 오신 날이나 다름이 없다.
중생이 태어나는 모습은 업의 그림자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여래의 탄생은 중생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여래의 본원(本願)은 중생 구제나 다름없다. 그 본원은 중생과 마주보고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대화를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묻고 실존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집과 미망이 사라지면 청정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으리라. 다시 말해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불교는 인간이 본래의 마음자리를 놓치고 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고 번뇌와 고통이 끊이질 않는다고 본다. 한마디로 내 마음대로 안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진정한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까닭에 생기는 감정의 그늘이다.
지금처럼 인간의 자각이 필요한 때가 있을까. 인간이 인간을 외면하는 성장과 경쟁을 하는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 우리의 삶은 공존의 논리가 무시되고 공멸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세상은 서로 맞물려 있는 거대한 네트워크와 같다.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연기적 구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연기적 사고는 스스로 마음이 주인이 될 때 회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마음이 주인이 되면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이웃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상생과 조화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이웃이 되는 것을 뜻한다. 알고 보면 이러한 이웃과의 대화는 매일 매일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삶의 물음표인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몸소 인간의 길을 걸었고 세상의 부귀와 영화가 부질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어른이다. 그래서 그 분을 다른 말로 명행족(明行足)이라고 부른다. 어느 누구보다 훌륭한 삶의 족적을 남겼다는 뜻인데 그 발자국은 깨달음으로 가는 이정표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하나의 생을 살면서 남기고 가는 흔적은 여러 가지다. 우리가 남기는 삶의 발자국은 번뇌와 욕심으로 각인된 흔적이므로 결코 뒷사람이 따르거나 배울 것이 못된다.
▼내안의 부처님 확인하는 날▼
결국 뒷사람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사월 초파일은 자신의 속에서 그 분의 존재를 확인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연등을 밝히는 마음은 욕심과 갈등의 마음이 아니라 자비와 용서의 마음이다. 어두운 마음을 밝은 마음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마음에 환한 등불을 밝히는 일이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는 현실적 수행이기도 하다. 사월 초파일에는 감사와 발원이 담긴 연등을 밝히면 어떨까.
착한 이에게는 축복의 등을
고마운 이에게는 감사의 등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애정의 등을
참회하는 이에게는 용서의 등을
소외된 이에게는 관심의 등을
병고에 시달리는 이에게는 쾌유의 등을
실업자에게는 희망의 등을.
현진 스님(청주 관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