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며칠전 입법안 한 부를 보내왔다. 가칭 정치보복 금지법안이다. 금주 중 국회에서 공청회를 갖고 안을 확정해 국회에 제출한다는 것이다. 검토해보고 공청회에 나와 의견을 말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초안을 대충 훑어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두번 세번 거푸 읽어본 다음엔 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러다간 그야말로 정치인 천국이 되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법이 통과되면 정치인이 뇌물을 받든, 뭘 하든 범법행위에 대한 처벌은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기막힌 정치인 보복금지 법안▼
한나라당은 입법 목적을 “정권교체 등 정치적 상황변동 시기에 정치인에 대한 수사기관 등의 합리적 이유 없는 불이익행위를 금지하기 위해서”라고 명시했다. 그리고 정치보복은 “정치적 이념, 소속 정당 및 단체의 다름이나 특정정당 단체에 대한 지지 반대를 이유로 수사, 세무 금융거래조사, 금융지원 중단, 인사상 불이익조치를 취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일단 듣기엔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모호한 개념으로 정치인 수사를 금지시킨다면 수사받을 정치인이 한 명이라도 나올지 의문이다. 정치인에 대한 ‘합리적 이유 없는 불이익행위’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 또 이념, 정당이 다르거나 특정정당을 지지 반대한다는 이유로 정치인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공언하는 기관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이는 뒤집어보면 어떤 범법행위에 대한 제재에도 정치인은 보복이라고 반발하며 피해 나갈 수 있는 근거를 법이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법안은 “정치인은 명백한 증거에 의한 통상적 수사 조사를 정치보복이라는 이유로 거부할 수 없다”고 명시하긴 했다. 그리고 국회에 설치할 정치보복 금지위원회에서 정치보복적 제재인지 여부를 판정하게 했다. 결국 정치인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기관이 판결이나 판정, 수사 조사를 하기 전에 정치인이 구성한 보복금지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일반인에겐 턱없는 특혜다.
이미 국회의원에겐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이 있다. 또 국회에는 해임건의권과 탄핵소추권 등이 있어 반대파 정치인에 대한 보복적 제재를 포함한 권력남용을 감시 통제할 수 있다. 이를 전면 행사하는 것도 모자라 수사대상 의원을 보호하기 위한 방탄국회를 끊임없이 열고 해임건의, 탄핵소추를 남발하는 게 우리의 정치현실이다. 그런데도 통상적 수사를 비켜가기 위한 또 다른 특혜를 주장하니 정치인을 한층 더 특수계급화하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
▼한나라, 여당땐 비난하더니…▼
정치보복 금지법 제정 발상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97년 대선 전 야당인 김대중후보측이 제안했었다. 당시 여당인 이회창후보측은 “헌법에 배치되는 정략적 발상”이라며 “뭔가 되게 찔리는 게 있으니까 엉뚱한 법을 만들려고 한다”고 일축한 바 있다. 그런데 이젠 상황이 반전됐다. 이총재측은 입법을 주장하고 김대통령의 여당은 반대한다.
불과 3년 만에 ‘헌법에 배치되는 정략적 발상’을 한나라당이 왜 이어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현정권이 정치보복을 하고 있다는 주장일 수도 있고 한나라당은 집권해도 보복하지 않는다는 걸 홍보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총재의 말처럼 우리 정치에서 정치보복이란 단어를 추방하기 위한 조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지금 입법하면 헌법에 배치되지 않으며 당시는 왜 헌법에 배치된다고 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정략적 발상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사실 한나라당 법안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국민감정의 문제다. 정치인 범죄라면 국민은 대개 검은 돈을 연상한다. 정치인의 불법자금 수사가 다소 정치보복적 성격을 띠었더라도 국민은 그보다 정치인의 파렴치한 돈 긁어모으기에 더 공분했었다.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사건도 한나라당 법안대로라면 정치보복으로 볼 수 있는데도 누가 그걸 보복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잘 파헤쳤다고 박수를 치지 않았는가.
돈세탁 방지법의 경우 계좌추적 대상에서 정치자금은 빼자며 여야합의도 파기했던 한나라당이다. 정치개혁을 하자면서도 정치인들의 구린 부분인 돈 문제 같은 것에 대한 조사는 원천봉쇄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는 한편 정치인 수사는 더 어렵게 하는 법안을 만들자니 그들만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 투정같이 들린다.
민병욱min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