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정책 분야에서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꼽히는 시라큐스대에 지난달 ‘한표욱 한미관계’강좌가 개설됐다. 한국인의 이름을 딴 정규 강의가 마련됐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한국 외교, 특히 대미외교사에 있어 한표욱(韓豹頊·85)옹의 존재는 그만큼 독보적이다. 1949년 주미대사관 창설요원으로 뽑혀 32년 간 주미대사관 전권공사, 제네바 유엔 영국대사로 활동해온 한옹은 말그대로 한국외교사의 산증인이다. 미수(米壽)를 앞둔 그는 머리만 하얗게 세었을 뿐 여전히 정정하고 열정에 가득차 있었다. 어떤 연유로 미 대학에 한옹의 이름을 붙인 강의가 생겨났는지 물었다. “그걸 설명하다보면 내 자랑이 될텐데…” 한옹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내가 42년에 시라큐스대를 졸업했어요. 대학에서 졸업생들의 활동을 유심히 살폈겠지. 한미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온 동문의 이름을 붙인 것 아니겠어?”》
지난 3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방미 이후 한미관계가 예전같지 않다는 말이 있다고 운을 떼었다. 신생 약소국의 젊은 외교관으로 미국무성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한미관계를 다지기 시작한 그의 눈에는 지금의 양국관계가 어떻게 비칠까. 한옹은 단호하고도 명쾌하게 말했다.
“한미관계와 정책은 전혀 변한 게 없어요. 나보다 미국을 더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요. 적어도 내 눈에는 금이 간 게 안보여. 왜냐.” 한옹은 잠시 말을 끊더니 미소를 머금으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시라큐스대 재학시절 별명이었던 ‘백만불짜리 미소를 지닌 리틀 코리안 보이’의 그 표정이었다.
"미국은 절대로 한국을 놓지 못해요. 러시아와 중국이 버티고 있지 않아요. 미국은 한국이라는 동맹국을 동아시아에 갖고 있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한국은 나라의 존립을 위해서도 꼭 미국의 맹방이 돼야 해요. 그런 원칙이 한미 양측에서 너무나 확고합니다.”
미국에 대한 한옹의 정서는 국가가 아니라 사람에 대해 갖고있는 심리와 비슷해 보였다. ‘서로 미울 때도 있지만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미국을 마치 사람처럼, 애증의 대상인 듯 설명했다. 그같은 관계를 맺는데 한옹이 큰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전적으로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의 힘”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가 이승만박사다. 팔순을 지난 나이임에도 그는 연월 일시까지 말할 만큼 기억력이 좋았고, 한가지 이야기를 시작하면 온라인상의 하이퍼텍스트처럼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어떤 부분을 클릭한다 해도 반드시 등장하는 대목이 이승만 전대통령과의 인연이었다.
“38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미국가는 뱃길에 하와이에서 8시간 정박을 했는데 그때 이박사를 처음 만났지.” 어려서부터 이박사에 대해서는 익히 듣고 있었다. 어릴적 부친은 “이승만이란 독립운동가가 미국에서 제일 좋다는 하버드대를 졸업했으니 너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했고, 그의 셋째 형님은 “미국에 가면 반드시 이박사를 만나야 한다”고 말해왔다.
물어물어 찾아간 하와이 농장에서 젊은 한표욱을 만난 이박사는 “한군. 지금은 미국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잠자고 있어. 그러나 점차 깨게 될거야. 그러면 한국에서도 기회가 생길거야. 한군은 그저 공부만 하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든지 도움이 될 터이니”하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하버드대 정치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워싱턴 국회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던 그를 이 전대통령은 주미 한국대사관 창설요원으로 발탁했다. 주재원은 장면(張勉)대사와 한표욱, 단 두사람. 당시 미국은 신생 독립국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을 포기하다시피한 미국에 나라사정을 설명하고 원조를 얻어내는 것은 젊은 외교관의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6·25전쟁이 벌어진 날부터 유엔안보리가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한 27일 밤11시30분까지 꼬박 72시간만큼 긴박한 순간도 없었다.
24일 밤8시30분(한국시간 25일 오전10시30분), 외교관파티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UP통신기자에게서 한국에 전쟁이 났다는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그날 밤12시 참사관이었던 그는 장면대사와 함께 국무부에 들어가 “당장 지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미국의 군사원조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도록 당장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라”는 이 전대통령의 전화지시도 떨어졌다.
“두시간 후 백악관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어요. 지금도 잊지못하는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미소를 띠고 있던 점이에요.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미소였어. 대통령은 ‘유럽이 송두리째 사라질 것같았던 1차대전 때도 도와주는 나라가 있었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할 때도 다른나라가 도와줬다’고 말했어요. 젊은사람의 직관으로 나는 ‘우리나라도 도와준다는 뜻이구나’하고 알아챘어요. 그날 밤 우리가 미대통령을 못만났으면 한국이란 나라가 없어졌을지도 몰라요. 우리가 조국을 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70년대 초반 유엔대사로서의 활동도 잊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고 한옹은 말한다. 시작은 악연이었다. 6·25 전쟁으로 부터 빚어진 인연이었으므로. 당시 유엔가입은 한국외교의 최대 현안이었고, 유엔외교란 모름지기 ‘안면외교’로 알려져 있었다. 폭넓게 사귀어둔 지인을 통해 한국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91년 우리나라가 유엔에 가입한데 이어 이제 유엔총회 의장을 맡게됐다니 그 감개무량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이제 보니 시작은 악연이었지만 그 끝은 역시 당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국력이 아니겠소.”
32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통해 외교관의 덕목으로 첫손에 꼽게 된 것이 인간관계를 잘 맺는 일이라고 한옹은 말한다. 외교 역시 인간관계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세련되고 유창한 영어를 하는 것도 필요하고, 세련된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사귀는 가장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대접을 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창기 외교관 월급은 고작 미화 300달러. 외교관으로서는 ‘근근히’ 살아갈 만한 돈이었다. 한옹은 그때까지 부부가 모아온 돈을 털어 한국음식을 차려놓고 자주 손님들을 초대했다. 한손으로 이삿짐을 싸면서도 한손으로는 만찬 준비를 할 만큼 아내(최정림씨. 96년 작고)는 뛰어난 외교관의 아내였다. 외국손님을 초대해놓고 신선로 갈비 잡채 등 정성스레 만든 한국음식을 내놓으면 그들은 단박에 한국팬이 됐다.
“우리 집사람이 연희전문 도서관에서 일하던 시절엔 남학생들 사이에서 ‘카추샤’로 불릴 만큼 인기가 좋았어요. 그때는 서로 몰랐었고 미국유학시절에 사귀게 됐지. 가진 것 없이 오로지 배움에 대한 열정만 있었던 식민지 청년이 어렵사리 유학생활을 견뎌낸 건 오로지 아내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아내는 나보다 박사학위(미시간대 문화인류학)도 먼저 받았고 한국여성으로는 세번째 박사가 됐을 만큼 똑똑했지만, 외교관 못지않은 외교관아내 역할을 정말 잘해냈어요.”
그들은 젊은 시절 “장학금 받아 남의 덕으로 공부해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언젠가 빚을 갚자”며 시신을 병원에 기증하자고 약속했었다. 부인이 별세하자 한옹은 약속대로 시신을 연구용으로 연세대의대에 내놓고 빈소를 차리지 않았다. 98년엔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 장학금 1억원을 내놓았고 아내가 병석에 누워 틈틈이 쓴 원고를 모아 ‘외교관의 아내―그 특별한 행복’을 펴내기도 했다.
10여년전 한옹은 후학들에게 “내가 한 65살만 돼도 참 할일이 많을 것 같다”고 해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일이 있다. 지금은 운전을 하지 않지만 몇해전만 해도 88년 장만한 스텔라승용차를 직접 운전하고 다닐 만큼 검약생활이 몸에 배어있다.
‘흰머리 청년’인 그는 지금도 여전히 분주하다. 한옹이 살고 있는 서울 동부이촌동의 오래된 아파트는 지난해 발간한 ‘한국통일의 문제’에 이어 분단과 통일에 관한 저서를 낼 자료로 가득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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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표욱 옹은…▼
△1916년 함경남도 북청 출생
△1938년 연희전문(현 연세대) 문과 졸업
△1942년 미국 시라큐스대 철학과 졸업
△1947년 미국 하버드대학 정치학 석사
△1949년 주미 한국대사관 창설요원
△1963년 미국 미시간대 철학박사
△1981년까지 주미대사관 1등서기관 참사관 전권공사, 주 제네바 태국 유엔 오스트리아 영국대사 역임
△미국 하버드대 극동문제연구원, 미국 조지워싱턴대 국제정치학교수,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교수, 한영협회장, 한국유엔협회장, 한국외교협회 이사 역임
△현 한국유엔협회, 한영협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