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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6]성삼문과 신숙주

입력 | 2001-05-04 18:33:00


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에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하나쯤은 읽고 감동을 받았던 경험을 갖고 있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어서 꿈 많던 학창 시절에 ‘흙’을 읽으면서 낭만적인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고,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읽으며 눈물을 훌쩍거린 적도 있다. 특히 ‘단종애사’는 어린 시절 깊은 감동과 함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단종애사’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사육신의 절의(節義)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반면 수양대군(首陽大君)과 그의 추종자였던 신숙주(申叔舟)에 분노한다. 특히 성삼문이 국문(鞠問)을 당하고 죽던 날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니 그의 아내 윤(尹)씨가 남편을 향해 오랜 동지인 성삼문과 함께 절의를 지켜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을 힐책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다락에 올라가 목을 매어 자살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비감(悲感)함을 금할 수 없다.

이같은 야사(野史)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는 신숙주와 성삼문의 정치적 공과나 선악을 따질 때면 성삼문의 편을 드는 데 익숙해졌다. 성삼문은 의인이요 신숙주는 비겁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숙주와 성삼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소설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그렇다.

▼연재순서▼

1. 한민족의 형성
2. 화랑과 상무정신
3. 첨성대의 실체
4. 최만리는 ‘역사의 죄인’인가
5. 김성일은 충신이었다
6. 성삼문과 신숙주
7. 서낭당에 얽힌 비밀
8. 당쟁과 식민지사학
9. 의자왕과 3000궁녀
10. 전봉준과 동학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로 떠나는데 이 때 신숙주가 동행했다. 수양대군 일행은 공식적인 업무가 끝나자 도성인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는 영락제(永樂帝)의 장능(長陵)을 찾아간다.

▼야사는 사실과 다를수도▼

영락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넷째 아들로 부왕이 죽고 그의 장조카인 혜제(惠帝)가 등극하자 그를 죽이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영락제는 평소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겠지만 나의 위업은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연 자신이 말한 대로 명나라 300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한 영락제의 능에 나란히 절을 하면서 수양대군과 신숙주가 무엇을 생각했을까를 짐작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서울로 돌아와 개성의 궁지기인 한명회(韓明澮)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수양대군이나 신숙주는 서울에 이르기 전 이미 그들의 앞날을 결심했다고 볼 수 있다.

신숙주와 달리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경륜은 그리 중요할 것이 없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충군과 절의, 그리고 학문이었다.

두 사람은 젊은 나이(1438년)에 함께 과거에 합격해 성삼문이 서른 여덟 살, 신숙주가 서른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성삼문이 죽으면서 헤어졌으니 20년 가까운 친교가 있었던 셈이다. 벼슬길에 갓 올랐을 때만 해도 그들은 혈기와 앞날에 대한 부푼 꿈에 젖어 굳이 다툴 것도, 피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자신의 주변을 스쳐가는 세상 풍파를 겪으면서 그들은 각기 사물을 보는 시각을 교정하기 시작했다.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했다.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

신숙주가 자신의 학문적 정치적 벗들이 참형을 당하는 순간 인간적 괴로움이야 없지 않았겠지만,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왕정의 비능률성이 인위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신숙주가 일신의 영달 만을 도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숙주와 성삼문의 만남과 헤어짐에는 두 사람 모두 가상하고 장한 데가 있다. 신숙주는 살아남아서 영락제의 무덤 앞에서 결심했던 바를 이룸으로써 조선조 500년 왕업의 초석을 이룩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건국 초기 불편했던 조일(朝日) 관계를 정상화시켰고, 강원도와 함길도(咸吉道)의 체찰사(體察使)로 파견되어 여진(女眞)의 침략을 막았으며, 몇 십 년 동안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 국가에 봉사했으니 당태종(唐太宗)에게 위징(魏徵)이 있었듯이 세조에게는 신숙주가 있어 왕업을 이룰 수 있었다.

성삼문은 젊은 나이에 자신이 확신했던 바를 목숨과 바꿨으니 그 또한 훌륭한 일이다. 그는 집현전 부제학이 되어 영화가 보장됐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세조가 통치한 기간에 받은 봉록을 한 푼, 한 알도 쓰지 않고 곶간에 쌓아두었다. 죽음 직전에는 거적을 깔고 살 정도로 곤궁했으나 절개를 굽히지 않았으니 그 또한 비범한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말하는데 홀로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 홀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용기가 필요하다. 만약 신숙주가 성삼문의 편이 되었다거나 성삼문이 신숙주의 편이 되었더라면 역사는 오히려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사람 각기 갈길을 갔을 뿐"▼

남한산성에서 항복 문서를 작성할 때 그것을 찢으며 통곡한 김상헌(金尙憲)이나, 찢어진 항복 문서를 다시 붙이는 최명길(崔鳴吉)에게 모두 깊은 속뜻이 있었고 훌륭했듯이, 성삼문도 훌륭했고 신숙주도 훌륭했다. 그러므로 신숙주는 성삼문의 고집을 야속타 할 것도 없고, 성삼문은 신숙주의 처신을 괘씸하다 탓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갈 길을 갔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성삼문은 의인이오 신숙주는 비겁자라는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역사 소설과 텔레비젼 연속극의 탓이다.

자살은 커녕 멀쩡하게 살아서 부귀와 복락을 누리다가 생애를 마친 신숙주의 부인 윤씨를 자살하게 만드는 식의 소설적 허구가 우리의 역사학을 병들게 하고 있다.

물론 소설과 정사(正史)를 구별하지 못한 독자에게도 책임이 있고 독자들에게 정확한 역사 자료를 제공하지 못한 학자들의 게으름에도 책임이 있지만, 그 일차적 책임은 작가에게 있다. 셰익스피어나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나 홍명희(洪命憙)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그들이 소설적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역사의 큰 흐름을 왜곡시킨 예가 없기 때문이다.

▼TV 연속극-소설이 정사 왜곡▼

한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사에 관한 지식을 얻는 매개물로 신문이 38.8%, 연속극 33.1%, 잡지 9.2%, 역사 소설 8.3%, 전문 서적 7%, 역사 강좌 3.2%로 나타나 있다. 연속극과 소설의 영향력은 두 개를 합해 41.4%로 가장 높다.

이 통계는 작가들에게 얼마나 열심히 공부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독자들이 얼마나 편하게 역사 공부를 하려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역사 공부는 모두에게 노력과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요즘 서점가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한 권으로 읽는 ○○○’류의 책을 보면서 독자와 필자가 역사를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하고 편하게 읽으려 하는가를 보는 듯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천장을 쳐다 보며 역사 소설을 쓰는 시대가 지나갔듯이 연속극이나 소설을 보며 역사 공부하던 시대도 이미 지나갔다.

요즘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도 혹시 우리가 역사학에 대한 투자와 노력을 게을리 한 업보는 아닌지,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되돌아보게 된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