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박정희 지음/276쪽, 1만3000원/한국방송출판
이삿짐을 싸려고 물건을 정리하다가 문득 책장 구석에 박혀 있던 젊었을 적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소복이 내려앉은 먼지를 떨어내고 조심스레 첫 장을 넘길 때의 떨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이렇듯 생각지 못한 순간에 불쑥 나타나는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이다.
11명의 손자 손녀를 둔 78세의 할머니가 자녀를 위해 모아두었던 기억을 한데 묶어 책으로 펴냈다. 지난해 말 KBS의 다큐 프로그램 ‘일요스페셜’에 방영돼 화제가 됐던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가 책으로 나온 것. ‘박정희…’에는 박씨가 1남 4녀를 키우면서 느꼈던 가족애가 가슴 저리도록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박정희…’는 첫 아이를 낳던 날의 기억, 그리고 그 ‘핏덩이’에게 되뇌었던 일종의 ‘주문(呪文)’과 같은 기원에서 시작된다.
“재주덩이가 되어 달라고? 아니다. 내 늙은 후 나를 잘 위해 달라고? 아니다. 유명해져 달라고? 아니다. 이웃 사람들의 빛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다오.”
박할머니는 이어 ‘너를 낳았을 때의 식구들’이라는 제목 아래 자신은 물론 아이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삼촌의 얼굴을 각자의 특징을 살려 정성스레 그려 넣었다.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사진과 함께 상세히 기록해놓았고 당시 살던 집 뜰 앞에 심어놓은 해바라기며 나팔꽃을 수채화 물감으로 곱게 그려놓았다.
한편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전 세계가 요동치던 당시 정세를 설명해놓는 등 기억의 한 조각이라도 놓칠세라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해방과 6·25전쟁을 겪는 동안 가난과 싸우며 23명 대가족의 안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고된 삶 속에서도 박씨가 이처럼 감수성을 잃지 않았던 것은 그의 타고난 예술적 재능 덕분이었다. 박씨는 한국수채화협회 공모전에 수 차례 입·특선했으며 개인전도 여러 번 가진 명실공히 화가다. 책 곳곳에 소개된 그의 그림은 독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과열되는 요즘 서점가에는 ‘우리 아이 이렇게 천재로 키웠다’는 식의 육아 지침서들이 넘쳐난다. 이 책에는 아이를 천재로 키우는 비법 따위는 없다. 그러나 아이를 하나의 성숙된 ‘인간’으로 키워내고자 한다면 이 책만큼 많은 비법을 담고 있는 지침서도 찾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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