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4세를 맞은 칸영화제는 정확히 1946년 9월20일 처음 태어났다. 만일 48년과 50년에도 쉼없이 영화제가 개최되었다면 칸의 나이는 벌써 56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칸의 역사는 유럽의 정치적 격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칸영화제의 탄생이 몇 년이나 늦춰졌고 두 번의 불안정한 휴지기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 최대의 영화축제로 발돋움한 칸영화제. 누벨바그의 신화를 창조한 프랑스 최고의 작가주의 감독 장 뤽 고다르는 칸영화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칸영화제에 대해 별다른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난 그곳에 영화가 있어서 간다"라고.
5월9일부터 20일까지 프랑스 휴양도시 칸에서 펼쳐지는 제54회 칸영화제는 올해 장편 경쟁부문 상영작 23편, 단편 상영작 12편,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상영작 24편,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상영작 20편 등 공식부문에만 총 126편의 영화를 준비했다.
반백의 나이를 훌쩍 넘긴 칸영화제에서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영화를 만나게 될까. 54년의 역사를 거슬러온 칸영화제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모아본다.
●칸은 베니스영화제의 사생아?
프랑스가 칸에서 새로운 영화제를 개최하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영화 종주국의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베니스영화제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었다. 칸보다 먼저 영화제를 개최한 이탈리아 베니스는 영화제를 통해 높은 관광수익을 올렸고 이를 부러워한 프랑스는 지중해 휴양도시 칸에서 새로운 영화제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무솔리니의 아들이 배후 조정한 영화 가 38년 베니스 영화제 대상을 수상하지 않았다면, 칸영화제의 시작은 좀더 늦어졌을지 모른다. 가 수상작으로 선정된 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연이어 베니스영화제 불참 의사를 밝혔다.
영화제보다 관광산업에 더 치중했던 베니스 영화제는 때마침 열띤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있었고, 유럽 전역에 새로운 영화제에 대한 욕구가 일기 시작했다. 이에 발맞춰 프랑스는 39년 제1회 칸영화제를 개최할 계획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개최 시기를 대폭 늦출 수밖에 없었다.
칸영화제가 처음 열린 해는 1946년 9월20일. 제1회 영화제에선 21개국에서 초청된 68편의 장편과 40편의 단편이 상영되었으며 르네 클레망 감독의 가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르네 클레망의 반란
칸영화제가 처음부터 국제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다. 칸영화제 역시 베니스영화제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영화보다 관광산업에 더 관심이 많았다. 영화비평가 앙드레 바쟁이 "칸영화제는 축제성격을 줄이고 영화에 대한 관심을 늘려야 한다"고 토로했던 것만 봐도 초기 칸영화제의 성격이 어땠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50년대 들어 칸은 점점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칸의 변화를 이끈 건 자기만의 색깔을 구축했던 세계 젊은 감독들. 오손 웰즈, 엘리아 카잔, 빈센트 미넬리 등이 영화 역사를 다시 쓸만한 새로운 영화를 들고 칸영화제를 찾았으며, 특히 르네 클레망은 영화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폈다.
칸영화제가 에 대해 "영화제의 축제적 성격을 거스르는 병적인 영화"라고 평하자 르네 클레망은 "그렇다면 어떤 영화가 영화제를 위한 영화인가?" 되물었다. 그의 질문은 칸영화제에 몰려든 젊은 감독들에게 중요한 화두를 제공했고 칸은 "영화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자리로까지 발전했다.
●누벨바그 감독들, 칸에 입성하다
누벨바그 영화운동을 주도한 프랑스 감독들이 칸영화제를 찾았다. 그중 프랑소와 트뤼포는 로 누벨바그 감독들 중 처음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인물. 이후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블롤 등이 차례로 칸영화제의 문을 두드렸다.
●비평가주간, 감독주간 시작
장편과 단편 섹션으로만 구성됐던 칸영화제는 62년 처음 비평가주간과 15인의 감독주간을 신설했다. 칸영화제가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 건 62년. 이 섹션을 통해 루이 브뉘엘의 , 페데리코 펠리니의 등이 처음 소개되었으며 이들의 영화는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소련의 보이코트
칸영화제 최초의 보이코트 사건은 제1회 영화제 때 일어났다. 소련영화 상영중 불미스러운 영사사고가 발생하자 소련대표들은 "붉은 군대의 영광스러운 위상을 모욕한 행위"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다행히 이 사건은 심사위원들의 설득으로 진정되었지만 칸영화제에 대한 동구권 국가들의 분노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황희연benot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