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 이유진 지음 344쪽 9500원 동아일보사국내 분위기가 얼음장같이 얼어붙어 있던 유신 치하의 1979년. 당신이 프랑스 시민권을 가진 재불(在佛) 학자이고 친분 있는 후배가 갑자기 ‘망명하겠다’며 당신을 찾아온다면? 그를 대한민국 기관에 넘길 것인가, 그의 의사를 존중할 것인가?
이 책에서 파리에 살던 심리학자 이유진은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는 스스로도 망명객이 됐다. 유신말기 한 때 떠들썩했던 ‘한영길 사건’의 주역이 그였다. 망명하겠다던 한씨는 갑자기 한국대사관에 나타나 “간첩 이유진에게 끌려다녔다”고 말했다. 이유진은 프랑스 경찰의 조사결과 ‘무혐의’로 드러났지만 조국과 교민사회는 그를 ‘적’으로 낙인찍었다.
무엇이 한 평범한 학자를 현대사의 희생양으로 만든 것일까? 오랜 망명생활에 대한 회고, 프랑스 사회의 단상, 한없는 향수(鄕愁)의 고백을 담은 이 책에 힌트가 주어져 있다. 불합리, 폭압, 모순을 그냥 보고만 넘어가지 못하는, 객기마저 엿보이는 비판정신이 그로 하여금 오랜 인고의 시간을 감수하도록 한 것은 아닐까?
‘한영길 사건’ 훨씬 이전 그는 이미 한국 정부에 미운 털이 박힌 상태였다. 유학생 간첩사건으로 조작된 ‘동백림 사건’을 항의하기 위해 1967년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기 때문. 그에 앞서 ‘남한의 반공주의’를 심리학적으로 연구해 학위논문을 쓰고, 북한 사람들의 배구경기에 찾아가 박수를 보낸 일 역시 낡은 ‘이념’을 벗어난 비판정신의 소산이었지만, 그 때문에 그는 언제나 ‘감시인물’이었다.
한영길 사건으로 파리 한인사회에서조차 고립 된 뒤 1981년 평양 방문이라는 ‘모험’에 이른다. 그가 평양에선들 고분고분했을까.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했다지요? 2000만 명이 다 찬성했다구요? 저 같은 바보가 한 사람도 없었단 말입니까? 저 같으면 반대인데….” “수령이 있어서 인민이 있다구요? 수령은 아예 인민이 아닙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을 따라 한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인민 대표를 뽑아놓고, 통치하기 좀 편합니까?”
그 후 그는 관광 가이드에서 홍세화의 권유에 따른 택시 운전까지, 온갖 직업을 전전했다. 전문의로 활동 중인 딸을 프랑스인에게 시집보내고 지금은 부인과 장애아인 아들을 돌보며 가없는 망향의 한에 젖어 산다. 굽히지 않는 비판의식은 그의 귀국을 막는 빗장이다.
“그들은 나에게 ‘소명절차’라는 걸 요구한다. 그러나 소명을 거쳐야 할 사람은 정보기관에 쫓기는 후배를 도와준 나를 간첩으로, 아동 인질범으로 몰아붙인 그들이다. 문제는 내가 서울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다. 문제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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