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대학 문 앞을 지나는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아침 출근 때마다 작은 고민이 하나 생겼다. 줄곧 타고 다니던 승용차를 타고 갈까 지하철을 탈까? 불과 20분 남짓 운전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마주치는 난폭 운전자들에 대해 상을 찌푸리면서도 오랜 습관을 버리지 못해 달리는 작은 방 안에 주저앉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기왕에 적지 않은 보험료와 세금을 지불한 터인 자동차를 주차장에 그냥 세워둔 채 전철을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택할 것인가? 아니, 내친 김에 승용차 자체를 아예 처분해 버리고 대중교통과 택시에 의존하는 것은 어떨까? 여기서 생각은 자가용과 대중교통 사이의 단순한 선택에서 '소유'냐 '향유'냐라는 좀 더 보편적인 문제로 발전한다.
정기적으로 갖는 어떤 회합에서 선배 한 분은 늘 '서울시장이 보내준 차'를 이용한 덕분에 혼잡한 시간에도 모임에 늦지 않음을 은근히 자랑하시곤 했다. 알고 보니 그 분이 향유하시는 차는 다름 아닌 지하철이었다. 나 또한 20년 가까이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집에서 앞으로 내려다 보이는 한강과 뒤에 딸린 수 만평의 후원을 향유하고 지낸다. 철마다 온갖 꽃들이 이어서 피고 초록에 지친 단풍이 하늘을 가리는가 하면 눈꽃이 가지를 휘어지게 하는 드넓은 후원이지만 손수 가꾸는 수고도 필요 없고 세금 걱정도 없다. 대로가 주봉에서 잘라내어 녹색 섬을 만들어 놓은 남산의 한 자락인 이 '후원'이 비록 내 소유는 아니지만 나는 아침마다 휘적휘적 올라가 발 아래 한강을 내려다 보며 심호흡하는 맛을 모자람 없이 즐긴다.
몇 년 전, 프랑스에 가서 체류하는 동안, 지난 날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은퇴한 프랑스 외교관을 만나 파리 교외에 위치한 어떤 마을의 집을 같이 보러간 적이 있었다. 이제 은퇴도 했으니 그의 부인은 파리 교외에 자기 집을 한 채 구입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끝내 마땅한 집을 정하지 못하고 돌아오면서 그는 집을 사겠다는 부인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집 한 채 값이면 세상 곳곳을 여행하며 호텔에서 남의 시중 받아가면서 느긋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데 뭣 하러 집을 사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반드시 집을 소유해야 한다는 붙박이 특유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그 말에 일종의 참신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생각을 본받아 소유를 버리고 향유만 고집할 자신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 거침없는 향유 지향적 인생관을 수긍하고, 또 그런 발상을 밑받침해주는 복지사회가 부러워지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소유보다 사용에서 더 많은 부를 누릴 수 있다"고 했다. 근착 신문을 보면 앵글로색슨에 이어 프랑스 사람들도 이 그리스 철학자의 예언에 근접해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빌려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물론 웨딩드레스, 프라이팬, 스테레오, 드릴, 파라솔, 가구, 카메라, 컴퓨터, 대형스크린 텔레비전, 램프, 심지어 카페트까지 빌려 쓴다. 1년 전만 해도 없던 대형 렌트 백화점이 도처에 생겨나고 있다. 이 방면의 선두주자인 '키루투'(무엇이나 다 빌려준다는 뜻)는 750종 11만 개의 물건을 보유하고 있으며 점차 그 세를 확장해 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이 구매하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제품이 아니라 서비스다.' 스웨덴 스톡홀름 근교의 마을에서는 7000가구에 세탁기를 대여해주고 사용할 때마다 10쿠론을 받는다. 그리고 1000회 세탁을 하면(4∼5년) 신품으로 교체해준다. 파리에 새로 설립된 '공동금고'는 매월 약간의 회비를 지불하는 회원에게 언제나 자동차를 빌려준다. 예약자의 30% 이상이 출발 1시간 전에 차를 탈 수 있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나도 이제 10년씩이나 탄 낡은 자동차를 처분하고 모든 것을 '빌려서' 쓰는 향유의 시대를 슬슬 준비해볼까? 그랬다가 오히려 더 비싼 새 차를 구입하고 싶어지면 어쩌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소유와 향유의 적절한 균형점은 어디 쯤일까? 뒷곁 창문으로 솔솔 흘러드는 첫 번째 아카시아꽃 냄새가 짧은 인생에 허락된 신록 속으로 우리들을 불러낸다. 푸른 5월, 어쨌든 지금은 무엇보다 향유의 순간이다.
김화영(고려대 교수·불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