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말 IMF위기를 맞은 이후로 한동안 잠복했던 대기업 규제정책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최근 야당과 재계에서는 경제활성화를 위해 30대그룹 지정제도, 출자총액 제한제도 및 부채비율 200% 제한조치 등 일련의 대기업 규제정책을 완화하거나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계 규제완화 말할 입장되나▼
한국개발원(KDI)도 최근 발간한 재벌개혁의 정책과제와 방향 이라는 보고서에서 30대 재벌을 똑같은 잣대로 규제하는 것은 시장집중 및 독점력 제한이라는 경쟁정책 목적에 위배되며,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막기 위해 98년 폐지시켰다가 올해 4월 다시 부활시킨 출자총액 제한제도도 타당성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30대그룹은 부활된 출자총액 제한제도에 따라 내년 3월까지 순자산의 25%가 넘는 출자액을 해소해야 하는데 출자초과분은 올해 3월 26일 기준으로 14조원 규모로 집계되고 있다. 전경련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29개 그룹 중 19개 그룹은 초과분 해소가 아예 불가능하거나 불확실하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또한 한도초과분의 해소 방법으로는 주식매각(8조9518억, 65.5%)이 계열사 매각(1773억, 1.3%)에 비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하반기 이후 국내경제가 본격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공언하고 나선 정부로서는 이러한 재계의 공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재계의 투자심리 회복이 필수적인데 재계는 출자총액 제한에 막혀 신규투자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투자마저 주가하락으로 회수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1997년 36%였던 5대 재벌의 평균 계열사 지분은 1999년 48%로 늘어난 반면, 평균 계열사 수는 52개에서 46개로 조금밖에 줄어들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IMF위기 이후 한시적으로 채택된 30대그룹 출자총액 제한제도의 유예조치는 모기업의 계열사 지분 증대만을 가져왔을 뿐, 정부가 의도한 계열사 매각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여야를 포함한 정치권과 정부는 이번 주말 경제전문가 합숙토론회 를 통해 오해의 해소와 이견 조율을 모색해 본다고 한다. 그러나 암울한 국내경기의 침체 때문에 아직도 빚더미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대부분의 중소기업과 영세상인들, 그리고 중산층과 일반서민들은 정책공방보다는 현실적인 경제활성화 조치에 기대를 걸고 있을 뿐이다.
한국경제는 이제 누적되어온 개혁의 피로감에 지치고 내년으로 다가온 총선·대선의 정치 일정에 밀려 다시 표류하는 배로 변하고 있다. 정부와 재계는 설익은 구조조정 성과를 홍보하고 다니거나 색깔논쟁으로 구조조정의 명암을 정치쟁점화 하기에 앞서 철저한 자기반성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먼저 재계는 30대그룹 출자총액 제한조치가 유예된 지난 3년 동안 계열사 매각을 통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조조정을 단행해 정부의 조치에 화답하였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1998년과 1999년에 대규모로 실시한 유상증자에서 재벌기업들은 계열사간 순환출자라는 편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실질적인 외부 신규자금의 조달 없이 가공적인 자기자본을 만들어 부채비율을 줄여 왔을 뿐이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있어서도 재계는 소극적 자세로 일관해 왔다. 주요 상장사 주총에서 일어났던 경영세습의 작태, 편법증여의 시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부에 대해 규제완화를 요구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정부는 개입 자제해야▼
정부 또한 재벌규제의 실효성을 이미 상실하고 있는 30대그룹 출자총액 제한조치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금융 구조조정과 관치금융의 철폐, 주식시장에의 부단한 개입을 자제하여야 한다. 간접금융과 직접금융시장에서 재벌의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무분별한 사업다각화가 심판받을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연기금을 통한 부단한 증권시장에의 개입, 관치금융적 인사관행의 유지 및 회사채 신속인수제도의 도입 등 정부 스스로가 구조조정의 원칙을 무너뜨려 왔다는 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표학길(서울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