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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민병욱]두 사람의 40년

입력 | 2001-05-14 18:23:00


청록파 시인 박목월은 1939년 ‘문장’지를 통해 시단에 데뷔했다. 정지용 시인의 추천을 받아서였다. 그의 초기 시가 얼마나 섬세하고 아기자기했던지 지용은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목월이 날 만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더 다듬으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목월의 시가 바로 한국시’라는 칭찬도 추천사에 덧붙였다.

그래서일까. 목월은 평생 정지용을 잊지 않았다. 78년 타계할 때까지 근 40년간 그는 시 한편을 퇴고할 때마다 지용의 말을 되새기곤 했다고 한다. “옥에 티나 미인의 이마에 사마귀 하나야 버리기 아까운 점도 있겠으나 서정시에 말 한 개 밉게 놓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바로 그렇게 시어 하나하나를 갈고 다듬어 완성하는 정신으로 목월은 40년 시 인생을 ‘난’처럼 살다 갔다.

▼"JP가 이래서야 되겠는냐"▼

자민련 명예총재 김종필씨(JP)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계에 데뷔했다. 박정희 소장을 좇아서였다. 쿠데타에 참여한 육사 8기생 중령들 중 그의 정치적 지략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박정희는 그를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앉히고 공화당 창당의 산파역을 맡겼다. “위에는 박정희가 있었거니, 밑에는 김종필이 있다”는 얘기가 그때 나왔다.

그 JP가 내일로 정치입문 40년을 맞는다. 혼란과 위기에 빠진 국가를 재건하고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군부가 나섰노라고 강변했던 옛 다짐이 지금 JP에게 어떻게 되새겨질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혁명과업’을 완성하면 군문에 복귀한다던 공약을 깨고 5·16을 40년 정치인생의 기점으로 삼은 그에게 지금도 여전히 국가와 민생을 위해 정치를 계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을 따름이다.

“‘나라꼴이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우국충정이 나를 혁명으로 이끌었다”고 JP는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 많은 국민은 “JP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며 걱정을 한다. 걱정 정도면 괜찮은데 그걸 넘어 분노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도대체 JP가 나라나 국민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이런 식의 행태를 보일 수 있느냐는 비난이 심상치 않다.

최근 그를 구설수에 몰아넣은 것은 골프정치다. 3당 연합 수뇌부와의 골프잔치로 여론이 죽 끓듯 했는데도 그는 며칠 후 보란 듯이 박세리 선수와 함께 필드에 나타났다. 그리고 한 말이 “우리도 골프를 산업으로 발전시켜 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그의 측근은 “JP는 듣도 보도 못한 내기골프 구설에 올라 속이 상했지만 골프는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이쯤 되면 그가 정치인인지 골프인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골프가 아니다. 사실 나는 JP의 골프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잘 돼간다면 그에게 노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종일 필드에 나가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마저 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런가. 우선 정치를 보면 집권 3당 연합은 하는 일마다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그 중에서도 JP의 처신은 많은 이를 불쾌하게 하고 있다.

경제와 민생은 더욱 아득하다.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뛰고 100만명이 넘는 실업자의 원망어린 구호가 도심을 메우고 있다. 빈부격차가 심화돼 사회적 약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하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집권측 정치인이라면 틈나는 대로 골프장에 가는 행태를 보일 수 없는 때다. 어쩔 수 없이 갔더라도 여론의 화살을 맞으면 반성하고 근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상식인 상황일 것이다.

그런데 JP는 그러지 않는다. 여론에 연연하거나 민심에 흔들리지 않는다. “누군 죽어라 일하는데 JP는 죽어라 골프만 치느냐”는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골프장을 찾고 골프 예찬론을 편다. 국민의 지적에 귀를 막고 내 좋은 길만 택하겠다는 것이니 이게 쿠데타 기질이지, 국민을 섬기는 민주적 정치인의 자세가 아니다.

▼국민의 지적엔 귀막아▼

한국현대사에 군사정치, 정보정치의 싹을 틔웠으나 또 한편 산업화를 이룬 세력으로 평가받는 JP다. 그의 40년 정치역정이 남긴 숱한 공과를 요즘의 골프 얘기 하나로 단정해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목월이 평생 초심을 잃지 않고 말을 갈고 다듬어 40년 시 인생을 아름답게 남기고 떠난 것과 JP가 구설수에 오른 것을 대비해 보면 정치 40년은 너무 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민병욱min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