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정권도 경험해 보았고 전라도 정권도 경험해 보았다. 군사정권도 경험해 보았고 문민들의 정권도 경험해 보았다. 근대화를 내건 정권도 경험했고 신한국 건설 의 정권, 제2건국 을 표방한 정권도 경험해 보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 모든 정권들이 보여준 지배 행태에 대한 실망뿐이다. 객관적으로는 지금까지 있어온 정권들이 각기 이룩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실망은 더해가는 듯 하다. 그래서 정치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점을 5과(過) 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역대정권 공통된 지배방식▼
나라가 안팎으로 처한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정치 안정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정치 불안정의 원인을 거론할 때 흔히 지적되는 것은, 정치판을 이루는 국회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야당이 국정에 대한 협력을 게을리 하는데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야당의원들 빼내가기도 있었고 근래에는 의원 꿔주기도 있었다. 물론 집권당이 국회에서 숫적으로 열세인 경우 국정운영이 여간 힘들지 않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달리 예를 생각해 보면, 집권당이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고 하여 반드시 정치 안정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간의 한국정치의 경험이나 외국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다. 일당 전제 하에서도 정치불안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원인은 다른 데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미 관행처럼 되어서 눈에는 쉽게 들어오지 않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정권들의 지배방식에서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적(私的) 권력장치의 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배자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나 또는 전통적인 관습을 기초로 형성되는 충성에 바탕을 둔 지배가 아니고 물질적인 유인이나 자리의 보장으로 교묘하게 얽혀진 충성을 바탕으로 이룩되는 지배형태인 것이다.
어떠한 헌법구조를 가지고 있던지 현실적 지배는 사람이 하는 것이어서 사적인 권력요소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미국의 케네디 전 대통령이 안팎의 패거리 를 가지고 정권을 운영한 것이라던지 또는 옛 소련의 후르시초프나 브레즈네프가 자기들의 출신지역 인사들을 대거 기용한 외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지역주의 또는 가신정치라고 말하는 인사정책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군사정권에 있어서 최고사령관에 대한 충성보다는 직속상관에 대한 충성을 바탕으로 인사가 이루어지는 것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이런 지배형태는 현대국가의 기능이 확대될수록 더욱 강화되어가는 일면을 보여준다. 준(準)공공기관이나 국영기업의 확대는 사적 권력장치를 소화(消化)하는데 이용되며, 이는 보편적 전문자격을 요건으로 하는 관료의 기용과는 전혀 달라서 원칙적인 갈등을 일으키며 권력 강화에는 도움을 준다. 이런 형태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야심있는 관료는 출세를 위하여 사업가와 같은 행태를 보이게 되어 부패는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일 뿐 아니라 행정의 합리성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다원주의적 균형은 언제나…▼
발달된 민주국가에서는 이런 지배에 대한 폐단이 강력한 다원주의적 균형에 의해 통제된다. 그러나 지금 한국과 같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를 정착시키는데 필요한 '강력한 정부'라는 명분을 내걸고 기본적으로 정부권력에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힘을 제압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사적 권력장치가 좀처럼 힘을 잃지 않으려니와 정치 안정을 위한 통치의 합리적 제도화를 기대하는 것도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현재의 정부도 반세기간의 지배 전통의 연장선에 서서 그 전통을 더욱 강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 중대한 문제를 제쳐놓고는, 다음 대선에서 정권이 다른 손으로 넘어간다 한들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더욱이 근래에 불거져 나온 개헌론이나 당정(黨政)분리론 등도 사적권력의 강화를 몰래 시도하는 장난에 불과하다. 우리는 변할수록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노재봉(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