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널찍한 이부자리에 베개 두 개가 놓여 있다. "자, 여기를 보세요, 하나, 둘, 셋…" 사진사의 음성인 듯한 목소리가 녹음기를 통해 흘러나오고 눈앞 벽면에는 끊임없이 흑백 가족사진이 흘러나온다.
그 흑백사진에 개인으로서의 '나'는 없었다. 나는 누구의 자식이자 아버지로, 때로는 어깨를 감싸이고 때로는 아이를 안고 있는 가족 속의 나였다. 이부자리에 베개 두 개. 인생은 거기서부터 시작해 저렇듯 눈물겨운 한 일가(一家)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울컥 목울대가 잠겨왔다.
지난달 27일부터 서울 신문로 2가 서울특별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가족'殿은 가족을 주제로 한 회화, 사진, 조각, 설치 등 현대미술가 40명의 작품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앞의 작품은 김병직, 강혁, 고정화의 설치 작품 '아버지의 꿈'. 이 작품을 지나치자 눈가를 따뜻하게 했던 가족은 사라지고 핵가족 사회에서 해체된 가족의 모습이 생경하게 펼쳐졌다.
강승희作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었어요
전시장 1층부터 2층까지를 500여벌의 여학생 교복으로 장식하고 있는 강승희의 설치작품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었어요'는 그 규모만큼이나 충격적이다. 이 교복에는 '엄마는 그냥 호프집에서 술만 따르는 줄 알아요', '이상하게도 껴안지도 않고 정면을 바라보고 앉은 채 손만 몸에'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어 가족의 붕괴로 인한 학생들의 방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산층 젊은 부부의 일상을 단순한 구도로 찍은 김기태의 사진작품 '부유하기-가정속으로'는 소통의 단절을 통해 '표정 없는' 부부로 전락한 가족 관계를 꼬집고 있다.
구본주의 철 작품 '하늘이 무너지다', '눈칫밥 30년'은 평범한 가장이 겪는 설움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지하철 상판 같은 소재로 남자의 다리를 세워놓은 모습이나 둥근 원판에 눈만 내놓은 중년 가장의 모습은 구제금융시대 이후 가장의 피로감과 추락을 상징하는 듯하다.
구본주作 눈칫밥 30년
이외에도 '집나온 여자'(방정아/유화), '오늘'(정국택/ 철), '가족의 그림자 연작'(표영환) 등의 작품은 점점 붕괴되는 가족과 그에 비해 별 대안이 없는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서울시립미술관 한미애 큐레이터는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이라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며 "권위에서 평등으로, 관계에서 개인으로 세상의 초점이 변하면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은 '가족'의 참뜻을 되새겨보자는 의미에서 이 전시회를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시회 '가족'은 오는 18일까지 계속된다. 관람은 무료다. (문의처: 02-736-2024)
안병률/ 동아닷컴기자mok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