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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8]당쟁과 식민지사학

입력 | 2001-05-18 18:46:00

그림 송영방 화백


TV드라마가 끼친 가장 큰 폐단은 시청자들에게 당쟁에 대한 오해를 유발한 점일 것이다. 역사극에 등장하는 우리 선조들의 정치하는 모습이란 음모를 꾸미고, 복수하고, 귀양을 가거나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죽는 등 역사에 대한 긍지보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 몫 하고 있다.

그러나 당쟁을 바라보는 이같은 시각은 일제시대 식민사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후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한국인에게 자치 능력과 자질이 없다는 논리를 전개해야 했는데, 그 가장 적절한 논거를 당쟁에서 찾으려 했다.

▼연재순서▼

1. 한민족의 형성
2. 화랑과 상무정신
3. 첨성대의 실체
4. 최만리는 ‘역사의 죄인’인가
5. 김성일은 충신이었다
6. 성삼문과 신숙주
7. 서낭당에 얽힌 비밀
8. 당쟁과 식민지사학
9. 의자왕과 3000궁녀
10. 전봉준과 동학

그리하여 시데하라 아키라(幣原坦), 오다 쇼코(小田省吾),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하야시 야스스케(林泰輔) 등 일본 학자와 한국의 친일 사학자들이 이에 가세해 ‘조선은 당쟁 때문에 멸망했고, 일본이 통치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식민사학자들이 당쟁을 비난하는 논리에 따르면 한국인의 민족성이 본래 싸움을 좋아하고, 잔혹하고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기 때문에 당파 싸움이 가열되었다는 것이다.

▼"피가 더러운 민족" 주장까지▼

특히 호소이 하지메는 한국인이 생리학적으로도 일본인과 달라서 피(혈액)가 ‘거무칙칙하고 더럽다’라고 썼다. 그러니 어찌 피를 속일 수 있으며, 어찌 이 민족을 개량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에 한국인들이 장단을 맞추어 ‘민족개조론’이 등장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소설가 이광수(李光洙)였다.

해부학자도 아닌 호소이가 한국인의 혈액을 거론한 것은 반론할 가치조차 없다 하더라도, 한국인이 그토록 싸움만 좋아하는 민족인가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의 한국은 하천을 중심으로 하는 농경 시대의 자연주의가 풍미하고 있었다. 민족 심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종교나 학문 또는 심성에 관계없이 인애(仁愛)를 중시하는 유교적 영향, 그리고 자비와 업보(業報)를 기본 관념으로 하는 불교적 영향을 심층 심리에 깔고 있어 매우 평화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한국인이 싸움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식민사학자들은 당쟁의 투쟁기간을 터무니 없이 길게 잡았다. 이 점은 너무도 집요하게 우리를 세뇌했기 때문에 알 만한 사람들조차도 조선왕조 500년이 온통 당쟁으로 지고 샌 줄로 알고 있다.

▼집요한 세뇌 현재까지 영향▼

조선조에 당쟁이 발생한 것은 선조 초기인 1575년이다. 그러나 당쟁이 역사적으로 비난받는, 즉 무고하게 인명을 살상하는 양상으로 변질된 것은 기껏해야 50년 정도의 세월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숙종(肅宗) 6년(1680) 남인인 허적(許積)과 윤휴(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