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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송호근/의약분업 실패 여당책임

입력 | 2001-05-20 18:59:00


얼마 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엽서가 날아왔다. 진료내용에 허위가 없는지 검토해달라는 것이었다. 의사 고발을 재촉하는 엽서 3600만장이 발급되었다는 후문이다.

경남 사천에서는 동네의원들의 진료카드를 모조리 검사하려던 수사과장의 과잉충성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진료비 과다 계상과 허위청구를 행한 의사에게 중징계 및 영업정지를 명하는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시민단체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이 관료, 정치권, 의사들에게 있다고 목청을 높였으며 여당은 보건복지부를 속죄양으로 만들었다. 이런 와중에 의사들은 다시 분노의 대열을 정비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완벽한 실패’로 드러난 정책을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는 한국 의료정치의 현주소이다.

댐공사를 하려면 환경영향평가가 우선되어야 한다. 동네의 실개천 공사를 해도 버들치, 쉬리, 동자개 등이 이동할 통로를 만들어 준다. 의약분업은 의료행태의 근본적 변화를 촉발하는 거대한 공사였다. 그러므로 50년 동안 형성된 복약생태계의 중앙로를 막았을 때 어떤 변화가 발생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했어야 했다. 조사에 의하면 의약분업 실시 후 두 가지 큰 변화가 발생했다. 의료기관 이용을 포기하는 사람이 9%에서 15%로 증가했고, 의원을 찾는 환자수가 30% 가량 급증했다는 점이다. 의료비 압박에 의한 이용포기는 하층민들의 건강을 악화시킬 것이며, 환자수 급증은 건강보험 재정적자와 진료시간 단축을 초래했다. 의사수입 증대를 비난하면서도 진료시간의 불가피한 단축현상에는 관심이 없으며,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늘어난 것에 누구도 우려를 표명하지 않는다.

감사원은 차흥봉 전보건복지부장관의 허위 보고와 과장급 이상 해당 공무원의 재정추계 실수를 정책실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하고 이들을 처벌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의약분업의 주무관청인 만큼 문책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허위보고를 감행할 간 큰 장관이 어디에 있으며, 학자들도 감지하지 못한 복약생태계의 거대한 변화를 행정관료들이 어떻게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겠는가? 사회정책을 제대로 기획하려면 정책디자인, 실제효과, 부작용 방지대책을 체계적으로 분석 제공하는 지식인프라, 즉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그런 것이 없는 상황에서 개혁드라이브에만 매달리는 정치권의 무지한 재촉을 감당할 관료가 어디 있으랴. 해당집단들의 이익투쟁은 관료들의 권한을 훨씬 넘어 정치권의 조정을 요구하는 성질의 것이다. 참패의 책임을 관료에게 물으려면, 우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치권이 관료에게 어떤 인프라와 자율성을 제공하였는지 반성해야 한다. 더욱이 사회정책의 중요성이 날로 급증하는 요즘 추세에서 여전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보건복지부에 대임(大任)을 맡겼다면 정치권은 그에 상응하는 후속 지원조치를 취했어야 옳았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돌격대의 선봉에 섰던 사무라이를 참수하는 영주는 없다.

그렇다고 해당관료들에게 면죄부를 선뜻 발급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 의료체계의 총체적 부실을 연출한 ‘무지의 게임’을 우선적으로 책임져야할 당사자는 바로 집권여당이라는 뜻이다. 의약분업의 정당성에 매몰되어 조기 실시를 강행했던 집권여당의 정책위의장, 정조위원장, 대통령 보좌진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시끄러운 책임공방전에서 슬쩍 비켜나 있다. 작년 의란(醫亂) 당시 집권여당의 몇몇 최고위원은 분업 잠정 유보를 권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을 박차고 나갔던 정책위의장은 이런 사태에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정치의 본령은 책임성(accountability)이며,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정치권은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 아니, 벌써 잃었을는지 모른다.

감사원의 감사가 관료처벌을 통한 정치권의 면책을 겨냥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책기획과 실행과정에서 미비했던 점 및 실패원인을 정확히 가려내어 의료체제의 위기를 수습하는 지혜의 자원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선진국은 엄청난 과학적 연구를 기초로 ‘작은 전진’을 도모한다면, 한국은 빈곤한 예측에 기대어 큰 성과를 노리는 ‘방종의 행진’을 감행했음을 다 같이 반성하는 일이 책임공방전의 본질이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