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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강원 인제 곰배령, 첩첩산중에 펼쳐진 초록의 낙원

입력 | 2001-05-23 19:15:00


갑자기 머리위로 하늘이 열렸다. 골짜기를 오르는 두시간 내내 태양을 가려 주었던 울창한 숲이 걷히면서 5월 한낮의 따가운 햇볕이 목덜미에 내리꽂혔다. 숲그늘이 사라짐은 능선에 다다랐음을 말한다. 완만하던 산길이 갑자기 가팔라졌다. 하늘이 넓어지면서 산줄기(능선)가 드러났다. 왼편(남쪽)의 호랑이코빼기, 오른편의 작은 점봉산을 잇는 능선. 도대체 낯선 것은 나무 한 그루 없이 밋밋하기만 한 산줄기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능선의 실체를 보고 나면 작은 탄성이 새어나온다.

“영화속에 나오는 곳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20일 일요일 오전. 점봉산 남쪽 곰배령 꼭대기(해발 1099.4m)에 오른 박광하씨(22·동덕여대 3년)는 날카로운 산줄기 대신 봉우리 사이에 펼쳐진 능선의 너른 초원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끝장면, 마리아와 폰트랩 대령 일가가 알프스를 넘던 장면에 등장하는 초원을 떠올린 것. 둘러보니 함께 온 모두가 한 생각인 듯 풀밭에 철퍼덕 주저앉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윽한 눈길만 주고 있다.

곰배령 마루의 주인은 바람인 듯하다. 능선 반대편(서남쪽)에서 곰배골을 타고 오른 바람은 고갯마루에서 절정을 이루어 한 순간도 쉼없이 초원의 풀잎을 훑는다. 그 마찰음이 비명처럼 들리기는 해도 기특한 것은 이런 시련 속에서도 싹틔우고 꽃피우며 번식하는 온갖 들풀의 강인한 생명력이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들풀의 현명함을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그 해답을 얻을 수 없으리라. 매년 5월(5∼15일)에 열흘간 얼레지 현호색 등 들꽃이 한꺼번에 초원을 뒤덮어 장관을 이룬다.

곰배령 들꽃님 만나러 가는 길, 그 길은 첩첩산중의 강선골을 통한다. 오지중에서도 오지로 소문난 ‘설피밭 마을’ 진동2리와는 지척간. 강선마을을 뒤로 하고 계곡으로 숨어든 오솔길을 따라 골안에 들어섰다. 전혀 딴 세상이 펼쳐진다. 두달째 계속된 가뭄으로 어지간한 계곡은 물이 말랐는데도 강선골은 다르다. “겨울에 눈이 올마나 많이 내리는데…. 다 눈 녹은 물이야.” 강선골에서 곰취농사를 짓는 칠순 할머니 말이다. 엊그제 고비 꺾으러 앞산에 올라보니 아직도 눈이 깊더란다.

강선골을 따라 곰배령까지 올랐다. 입산통제소∼고갯마루는 4㎞. 내내 물골과 함께 하는데 고갯마루 바로 밑 300m구간을 빼고는 70대 노인도 쉽게 오를 만큼 경사가 완만하다. 계곡 초입에서 서울서 온 남녀 직장인 4명을 만났다. 최근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라는 책을 낸 출판사 ㈜한언의 직원들인데 팀별 주제여행 도중이라고 했다. 산행경험이 별로 없어 보였는데도 한시간반 만에 올랐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걷는 숲그늘 짙은 오솔길. 강선골에서는 이런 것들로 제가 자연과 하나가 됨을 느껴요. 숲 안의 초록세상에 물들어 옷을 벗어 짜면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아요.” 박시형씨(여)는 숲속을 걷는 동안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자꾸 생각났단다. 영화와 숲의 분위기가 서로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숲 그늘과 계곡 물로 서늘한 골안은 온통 초록빛 세상이었다. 그 녹색도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한 새 봄 신록의 여린 나뭇잎과 풀잎에서 나온 청아한 빛깔.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키가 50㎝나 되는 고사리류였다. 군락을 이룬 곳은 마치 영화 ‘쥐라기 공원’을 연상케 할 만큼 원시적 분위기가 진했다. 숲길 가에는 수많은 들꽃이 피어 있었다. 연보랏빛 졸방제비꽃, 하얀 꽃잎 안에 까만 점이 박힌 개별꽃, 흰 잎의 바람꽃, 하얀 꽃이 무리지어 핀 귀롱나무, 연꽃처럼 꽃대가 불쑥 솟은 연영초, 잘린 줄기에서 빨간 즙이 나오는 노란꽃의 피나물…. 이 숲 안에서 초록에 반기를 든 것은 제철을 맞아 쉼 없이 피고 지는 들꽃뿐이다.

●곰배령 생태여행 패키지〓승우여행사(02―720―8311)는 점봉산 강선골과 곰배령으로 생태여행(당일)을 떠난다. 출발은 27일과 31일 두 차례. 코스는 진동리 설피밭마을∼강선골 숲길∼곰배령 초원∼쇠나드리. 3만5000원(어린이 3만원). www.seungwootour.co.kr

summer@donga.com

●곰배령 가는길

두 가지 길이 있다. 31번 국도에서 귀둔리(인제군)로 가서 곰배골로 오르거나 진동리로 가서 강선골로 오른다. 계곡은 강선리 쪽이 더 운치있다. 진동리 가는 길은 세 가지. 현리에서 418번 지방도를 따라 설피마을로 가거나 오색초등학교에서 단목령 넘기, 56번 국도로 가다가 서림리(양양군)에서 조침령 넘기 등. 조침령은 승용차로는 어렵고 단목령은 걸어서 오른다. 서울/현리는 양평∼6번/44번국도∼홍천∼철정검문소∼451번 지방도/31번국도(인제 방향)∼상남∼현리.

#생태여행은 이렇게

다음은 점봉산 숲을 연구해온 가톨릭대 조도순 교수(46·산림생태학)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강선골은 해방전에 훼손이 있었지만 그 후 50년간 인간간섭이 없어 본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한 ‘노령림’(Old Growth Forest)입니다. 생태계도 안정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외지인의 기업형 산나물채취로 식생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아는 주민 외에는 산나물 채취를 제한하도록 정부에 요청합니다. 그리고 생태여행을 떠난 분들도 이 세 가지는 꼭 지켜 주십시오. 우선 등산로를 벗어나 산을 오르내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산나물과 자생식물은 물론 풀 한 포기도 따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산에 올라 고함을 지르지 마십시오. 이것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의 욕심이며 자연파괴의 발로입니다. 생태여행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