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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민병욱]두 개의 선

입력 | 2001-05-28 18:24:00


임금이 붓을 들어 쭈욱 벽에 선을 그었다. 그런 다음 지켜보던 대신들에게 문제를 냈다. “누구든 이 선을 전혀 건드리지는 않으면서 짧게 만들어 보시오.”

대신들은 당황했다. 황당하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있는 선을 건드리거나 지우지 않고 짧게 만들 수 있는가. 도무지 할 수 없다며 모두 머리를 저을 즈음 한 현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말없이 붓을 들어 처음의 선 옆에 그보다 훨씬 긴 선을 그었다.

물론 그는 임금이 그은 선은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지 않은가. 더 긴 선이 그어지자 원래의 선은 마술처럼 짧아졌다. 만약 현자가 짧은 선을 그었다면 처음의 선은 길어졌을 것이다.

▼호흡이 긴 정치를 생각할 때▼

‘두 개의 선’ 이야기는 인도의 생활철학서에 들어있다. 어려운 문제의 답은 작은 발상의 전환에 있다는 교훈일 것이다. 또 실재하는 상황을 능가하는 새로운 큰 일로 기왕에 벌어진 일을 푸는 첩경으로 삼으라는 설명일 수도 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길거나 짧게 보이는 것은 상대적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나는 법무장관 인사파동으로 안팎 시련을 겪고 있는 집권측, 특히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 두 개의 선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지금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는 얘기다. 기왕에 그어진 선을 짧게 하려면 그보다 긴 선을 그으면 되듯 더 호흡이 긴 정치를 해나가야만 이 난국을 풀어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전후 장면을 보면 이번 인사파동은 ‘정권만을 위한 정치’가 빚어낸 앙화였다. 국민보다는 집권세력의 편의 위주로,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한 한낱 도구쯤으로 장관 인사를 주무르려 한 것이 화를 불렀다. 문제의 장관 임명자가 “부족한 저를 파격적으로 발탁해주신 태산같은 성은” 운운하며 “충성을 다해 정권재창출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 것은 임명권자가 ‘부족한’ 자신을 발탁한 의도를 꿰뚫었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었다.

정황은 그러하지만 사실 나는 그런 인사의 잘못을 미주알고주알 들먹이며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민주당 초·재선 의원들과 일부 최고위원들이 이미 여러 가지 문제점을 샅샅이 들추어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말깨나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임명권자의 책임’을 거론해 이번 파동의 본질에 상당히 근접했다.

다만 문제는 파동의 본질을 안다고 해서 바로 해결책으로 쓸 수 없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대통령이 책임을 진다면 도대체 그건 어디까지인가. 대통령이 사과하고 장관 추천자를 찾아내 문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만 그것으로 상황은 끝나는가. 정권재창출을 위해 무리수를 두고, 그 때문에 또 여야가 격돌하고, 결국 나라가 흔들리며 국민만 불안해하는 경우가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대통령과 집권측이 기왕의 잘못 그은 선에 연연하지 말고 그보다 긴 선을 그어줌으로써 국민에게 투영된 허물을 짧은 것, 작은 것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내 정파를 위한 정치’의 선을 그은 데서 인사파동이 비롯됐다면 이제는 새롭고 길게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치’의 선을 긋는 것만이 난국을 슬기롭게 돌파해나가는 방법이라고 본다는 얘기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선 그어라▼

물론 국민을 위한 정치는 철저히 자기를 버리는 데서 비롯돼야 한다. 어떻게든 정권을 연장시켜야 한다는 집착에서 과감히 벗어나라는 것이다. 아울러 파격적이며 파행적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소수 정권의 한계도 겸허하게 인정하라는 것이다. 나와 내 정파의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보다 오로지 국민을 받든다는 충심을 가져야 좁은 한계의 폭도 넓어지며 나만의 집착 또한 국민의 기대로 재생산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새로운 획을 그어나가라는 주문이다. 더 길고 두꺼운 선을 그어 처음의 선을 짧게 하려면 붓에 먹을 듬뿍 먹여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내부 소장파의 자성론을 분파적 행동으로 몰아붙이기보다 새롭고 두꺼운 획을 그으려 먹을 가는 충정으로 이해하면서 함께 붓을 들어야 국민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줄 것 아니겠는가.

잘못 그은 처음의 선이 있었기에 그보다 새롭고 긴 선을 다시 그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두 개의 선’이 주는 교훈이어야 한다.

민병욱min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