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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시평]박상용/후진정치가 살림 거덜낸다

입력 | 2001-05-28 18:33:00


김대중 대통령이 천명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실천하려면 이에 걸맞은 법제도와 윤리질서의 확립이 필수적이다. 세계화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아직도 기성세대의 대부분이 봉건적 시골마을 출신인 현실에서 새로운 체제를 위한 법제도와 윤리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려면 정치지도자의 양심과 의지,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단순한 경제논리도 모르면서▼

그러나 최근 법무부 장관 인사파동에서 보았듯이 정치지도자들이 봉건적 권위주의의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민주주의는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최근 건설교통부 장관의 재산파문에서 볼 수 있듯이 시장경제의 핵심인 재산권에 대한 정치지도자의 인식 수준이 고작 시골마을 범부(凡夫)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시장경제도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하여 작은 신용협동조합(신협)과 큰 재벌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신협은 공동유대에 속하는 사람들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비영리 법인이다. 그런데 1997년 12월 예금자보호법을 개정할 때 지역구의 표를 의식한 여야 국회의원들이 공무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원입법으로 신협의 예금은 물론 자본금까지도 예금보험 대상에 포함시키는 희화적인 일이 벌어졌다. 결국 조합원들은 조합이 제대로 운영되는지 감시할 인센티브가 없어졌고 정부만이 신협의 부실경영에 대해 책임을 지는 유일한 주체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지난 3년간 153개의 조합이 파산했고 공적자금은 이미 1조7000억원이나 투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1999년에는 규제완화를 명분으로 신협법을 개정하여 신협중앙회의 증권투자한도를 철폐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신협중앙회는 고금리로 유치한 자금으로 증권투자를 늘리다가 작년에만 1000억원의 손실이 났고, 누적적자는 6000억원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신협은 비영리이면서 출자자에 대한 이익배당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외국인의 눈에는 웃음거리로 보이는 기형적인 법인이다.

정치인들이 경제문제를 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부족하므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재벌의 문제도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경제위기가 닥치자 정부는 대마불사 신화를 깨려고 상호지급보증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구조조정을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출자총액한도를 없애는 실책을 범했다. 그 결과 순환출자가 증가하여 명목상의 부채비율은 200% 이내로 줄었지만 결합재무제표상의 실질적인 부채비율은 300%를 초과하고 있다.

결국 현대그룹의 예에서 보듯이 대마불사 신화는 아직도 여전하다. 만약 한국경제의 구조적 특성을 무시한 채 출자총액과 부채비율에 대한 제한을 풀기 시작하면 재벌의 도덕적 해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비슷한 예로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보자. 물론 현대건설과 같은 부실 거대기업의 문제는 부도로 단칼에 처치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거시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여 부실 대기업을 구제한다 하더라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지원은 곤란하지 않겠는가. 부실 대기업의 진정한 회생을 공정한 방법으로 도모하려면 부실기업의 대주주는 물론 임직원, 채권단, 협력업체, 지방자치단체 등 부실기업의 회생에 이해가 걸린 이해관계자 모두가 자구노력에 동참하는 조건의 지원책을 강구해야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고 지원의 효과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치인의 능력과 의지에 달려▼

신협의 문제를 보면서 국회의원들은 법을 엉터리로 개정하면 신협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단순한 경제논리도 이해하지 못했던지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는 헌법 46조를 위반하는 심각한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현대문제가 불거지자 장차관을 국회에 불러 호통을 치고 재벌규제의 문제를 정쟁의 대상으로 삼지만 재벌도 살고 한국경제도 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는 정치인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정치지도자의 양심과 능력과 의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의 체제 전환은 불가능할 것이다.

박상용(연세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