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27일 오전 11시. 하늘은 ‘계절의 여왕’ 답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It’s so wonderful!” ‘한국인 학생’ 5명과 함께 북한산 산행에 오른 미국인
제프리씨(42·군인)와 커리사양(18·고교3년)은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연방 즐거운 모습이다.
미국 네브래스카주 ‘시골’ 출신인 제프리씨는 “1000만명이 모여 사는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는 줄을 몰랐다”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등산도 하고 영어도 배우고’〓매주 일요일에 외국인과 함께 산을 오르며 영어실력도 쌓는 사람들이 있다.
국제등산클럽(ICC·02-2299-1885)이 올 2월에 내놓은 이색 학습프로그램 ‘등산 영어’의 회원들이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소속 한국인 회원도 벌써 50여명으로 늘었다. 대학생과 영어를 필요로 하는 사업가들이 대부분.
한 팀은 영어실력에 따라 외국인 1, 2명에 한국인 5, 6명으로 구성된다. 연회비는 36만원. 매주 등반시 2만원씩을 추가로 낸다. 제프리씨는 “부업 겸 취미로 산행에 나서지만 건강에도 좋고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배우는 효과도 있어 늘 일요일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생생한’ 생활영어 교육〓“공대 출신이라 영어를 소홀히 했더니 실력이 형편없는데….”
이날 처음으로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정지형씨(24·여·서울 강동구 둔촌동)는 내심 걱정이 됐다. 정씨의 고민을 눈치챘는지 ‘싹싹한’ 제프리씨가 정씨 옆으로 다가와 이름을 물었다.
“My name is Ji-hyung(지형이라고 해요).”
한국발음이 어려운지 “지-향?, 지-홍?”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제프리씨가 쉬운 영어로 “부르기 쉽게 영어 이름 하나 지어줄게요”라고 말했다. 2∼3분간 생각 끝에 나온 지형씨의 새 이름은 ‘포카혼타스’. 유명한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 처녀를 빗댄 것.
영화사에서 일하는 김종선씨(30·경기 광주시)는 처음 만난 커리사양에게 재미있는 ‘보디 랭귀지’ 하나를 배웠다며 즐거워했다.
“‘So so(그저 그렇다)’라는 뜻인데요, 손 하나를 내밀고 좌우로 까딱거리는 거예요. 얼굴표정도 중요해요. 약간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해야 필링이 전달된데요.”
허물없이 친해지자 남자 친구 얘기로도 화제가 발전하면서 그 분야의 영어 표현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정지형씨가 “I broke with my boyfriend(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라고 털어놓자 제프리씨는 “Why did you break ‘up’ with him?(왜 헤어졌어요?)”이라고 되물으며 즉석에서 교정해 준다.
▽또 다른 민간외교의 장(場)〓해군 출신인 제프리씨가 “82년에 포항에서 팀 스피리트(한미합동군사훈련)에 참가한 적이 있다”고 운을 떼자 4주째 이 산행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는 벤처사업가 김민수씨(46·경기 성남시)가 “나는 79년에 참가했다”고 반색한다.
군대얘기는 남자에겐 국경을 뛰어넘는 공통화제. 이들은 곧바로 친형제라도 만난 듯 ‘그 때 그 시절’ 얘기를 쏟아 놓는다.
북한산 입구 이북5도청을 떠난 지 1시간 후. 어느덧 목표 지점인 승가사에 도착했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산사를 유심히 둘러보던 제프리씨와 커리사양은 “한국 문화와 한국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2시경 하산한 이들이 순두부백반으로 점심을 함께한 뒤 다음 주 산행을 기약하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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