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교육도시인 보스톤에 가면 관광객이 즐겨 찾는 뉴베리 스트리트라는 거리가 있다. 도심을 관통하는 2㎞ 정도의 도로에 패션, 서적, 음반, 악세서리 등 다양한 문화상품을 파는 상점이 성업 중인데, 멋진 고전의상을 입은 경비병처럼 도열한 전통 건물들도 이 거리의 중요한 매력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보스톤의 명물로 탈바꿈하기 전 이 거리는 누구도 지나가기를 꺼렸던 슬럼가였다는 사실이다. 시의회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리노베이션을 통해 시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전통 건물들은 옛날의 단아한 모습을 되찾았고 맵시를 뽐내고 싶어하는 문화시민이 모여들었다.
▼인구집중등 부작용 심각▼
언제부터인지 서울 강남에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주택조합 결성을 축하합니다' 또는 '재건축 시공을 경축한다' 는 현수막이 심심찮게 나붙고, 친숙했던 저층 아파트가 속속 철거되고 있다. 헌집을 헐고 새집을 얻는 것은 집주인의 입장에서는 분명 기뻐할 일이다. 집 값이 벌써 오를대로 올랐고, 재건축이 결정된 아파트는 1억∼2억원의 웃돈이 얹혀져 거래되고 있으니 말이다.
자축 잔치에 끼지 못한 사람은 배가 아프다. 그러니, 너도 나도 재건축조합을 결성해서 목돈을 만져보려는 것은 당연한 욕심일 게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서울의 고질병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재건축 아파트는 대부분 30층 정도의 고층으로 설계되고, 소형보다는 중대형에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빽빽이 들어찬 고층건물 사이로 고층아파트가 속속 들어선다면 분명 그것은 도심의 난개발에 해당한다. 난개발은 수도권 외곽지역에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심장부, 그것도 중상층이 거주하는 강남지역에도 벌써 닻을 내렸다.
통계청은 올해 초 석달 동안 수도권 인구 순유입이 약 5만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이 추세라면 올해만 20만명의 인구가 늘어날 것이 예상되는데, 서울에 매년 춘천시 만한 인구가 보태지는 꼴이다. 이런 마당에 자축의 분위기를 타고 열병처럼 퍼지는 도심의 난개발은 인구유입을 부채질할 것이 뻔하다.
더욱이 그것은 상층계급의 지리적, 공간적 집중과 연결되어 있기에 단순한 인구증가의 의미를 넘어선다. 중하층의 생활양식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연간소득 3만달러 이상의 소비문화 및 교육 특구가 형성되는 것이다. 압구정동과 청담동을 중심으로 이미 특권층 지역이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특구의 영토확장이 상대적 박탈감을 촉발하는 것에 그친다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재산형성과 교육기회의 현실적 격차를 낳는 가장 중대한 요인이라는 인식에 이르면 문제는 자못 심각해진다. 강남주민이 되는 것만으로 자녀들의 명문대 진학률이 높아지고, 단지 재건축이 승인되었다는 것만으로 수억원의 이득을 보는 현실을 방치해 둔 채 인구분산책을 쓴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학교평준화를 강조한들 어떤 반향이 있으랴.
최근 정부는 주택시장과 건설경기를 활성화한다는 취지에서 내년 말까지 양도세 면제 조치를 결정했는데, 고사 직전의 건설업계를 생각하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 조치가 도심의 난개발을 부추기고 부유층의 유휴자금을 재건축 아파트의 잦은 매매를 겨냥한 재테크로 유인하다면 오히려 제조업체의 자금난을 악화시킬 우려도 없지 않다.
▼양도세 면제 투기 부추길수도▼
금융구조조정의 여파로 건실한 중견기업이 자금난을 호소하고 있는 반면, 도심의 중대형 아파트 분양에 수천명이 몰리는 현황을 보면 그런 우려가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이래저래 도심의 난개발은 IMF사태로 발생한 재산손실을 보전하려는 손쉬운 축재방편으로 활용되고 있는 듯한 인상이며, 급기야는 수도권이 앓고 있는 고질병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태세다.
한국사회에서 수도 서울의 문제는 전국의 문제였다. 서울이 기침을 하면 지방은 몸살을 앓는다. 수도권 외곽지역의 난개발은 수도권으로 입성해서 서울이 뿜어대는 온갖 충격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럴진대, 재건축을 명분으로 한 도심의 난개발, 상층계급이 운집한 강남의 난개발에 숨어있는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은 결국 전국민이 풀어야할 숙제로 발전할 것이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