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은 눈빛과 표정에 새겨진다. 마냥 착하고 귀여운 막내동생 같은 이미지의 TV탤런트 유호정(33). 28일 만난 그는 여전히 화사했지만 눈매가 깊어졌고 얼굴엔 언뜻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같았다. 벌써부터 굴곡 많은 매향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일까.
그는 조선후기 화가 장승업의 생애를 다룬 임권택 감독의 차기작 ‘취화선(醉畵仙)’에서 장승업(최민식)의 상대역인 기생 매향에 캐스팅됐다. 매향은 20대부터 40대까지 장승업을 평생 옆에서 지켜보며 사랑과 우정을 나눠온 실존 인물. 유호정은 연기생활 11년 만에 이 영화로 스크린에 데뷔한다.
◇임감독도 사진보고 즉석서 "OK"
탤런트 이재룡과 6년 전 결혼한 뒤 오랫동안 아이를 기다려온 유호정은 지난해 9월 막을 내린 KBS 아침 드라마 ‘송화’를 마지막으로 연기활동을 잠시 접고 8개월 간 쉬던 차였다.
“그 이전 SBS ‘청춘의 덫’에 출연할 때 유산을 했는데 또 잘못되면 평생 마음이 아플 것같아 쉬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이라 영화사에서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갈등이 많았지만, 내가 언제 임권택 감독님 작품을 해볼까 생각했어요. 평생 한 번 올까말까 한 기회인데 안 하면 너무 후회할 것 같았지요.”
그를 끌어내기 위해 제작사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은 유호정의 남편을 만나 “제발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인터뷰 도중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 사장은 “매향 역할은 기생이지만 귀티가 나야하고 연기력이 정말 좋아야 하는데, 유호정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고 거들었다. TV탤런트의 기용을 꺼리는 임 감독도 유호정의 사진을 보자마자 “아!” 하면서 즉석에서 결정했다고 한다.
◇"최민식선배와 연기 큰 행운"
유호정은 함께 출연할 최민식과는 한 번도 함께 연기해본 적이 없지만, 잊지 못할 인연이 있다.
“10년 전 햇병아리 연기자 시절, KBS에서 차를 이중 주차하면서 깜빡 잊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잠가놓고 간 적이 있는데요. 한참 뒤에 나왔더니 누가 와이퍼에 장문의 편지를 끼워놨더라고요. ‘당신의 실수로 다른 사람이 얼마나 불편할지를 잘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정중하게 쓴 그 글을 읽고 있는데 최민식 선배가 다가왔어요. 그가 편지를 쓴 거였지요. 너무 미안했는데, 최 선배는 ‘차 때문에 약속에 많이 늦긴 했지만 괜찮다’고 하지 뭐예요. 정말 멋있지 않아요? 영화 데뷔작을 그와 함께 하게 되다니, 굉장한 행운이에요.”
TV에서 그는 작가 김수현의 드라마에 단골 출연하는 ‘김수현 사단’ 중의 한 명. ‘작별’ ‘결혼’ ‘산다는 것은’ ‘청춘의 덫’ 등 김수현의 드라마 4편에 출연하며 함께 ‘김수현 사단’으로 불리는 탤런트 윤여정에게 연기가 무엇인지를 배웠다.
“윤 선배는 집에서도 늘 대본을 끼고 다니고 리허설할 때 이미 대사를 다 외워서 해요. 그만큼의 열정과 헌신을 따라가려면 나는 한참 멀었어요. 연기할 때마다 내 대사를 녹음한 뒤 숱하게 반복해서 듣고 단점을 고치는데 이것도 윤 선배가 권한 방법이지요.”
그는 “그렇게 좋은 사람들과 오랜 우정을 나누고, 내가 마음 속으로 간절히 원했던 일(영화 출연)을 할 수 있게 된 요즘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촬영중 아기 생겨도 좋겠네요"
오랫동안 애를 태운, 아이 갖는 문제에 대해서도 마음이 넉넉해졌다. “영화 촬영도중에 아이가 생겨도 좋을 것 같아요. 배역 때문에 서예와 생황, 단소 부는 것도 배우는데 그만한 태교가 어디 있겠어요”하며 살짝 웃는다.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여배우로서 요즘 그의 희망은 ‘뒷모습이 고운 배우’가 되는 것.
“얼마 전 ‘화양연화’를 보며 여자의 원숙한 뒷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감탄한 적이 있었어요. 뒷모습은 거짓말을 못하지요. 뭐랄까, 살아온 태도가 배어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며 늦봄의 따사로운 햇살 속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 역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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