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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서지문/인문학의 위기

입력 | 2001-06-01 18:28:00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에서는 요즈음 명유(名儒)가 배출되고 있다”면서 “원래 백제에서 책을 얻어다 보았던 몽매한 일본이 학문으로 우리나라를 능가하게 된 것은 중국에서 좋은 책을 모조리 구입해서 보았고 또 과거(科擧)를 보아 관리를 뽑는 잘못된 제도가 없어서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산 자신은 스무살 무렵부터 과거 공부를 하고 벼슬을 하느라 진정한 학문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시나 문장은 “아무리 맑은 물로 씻어 낸다 해도 끝내 과거 시험 답안 같은 틀을 벗어날 수 없다”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다산은 자식들은 집안이 폐족(廢族)이 되어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되었으니 벼슬하기 위한 학문이 아닌 진정한 학문에 정진할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우리는 보통 조선조가 쇠퇴한 이유를 500년 동안 인문학만이 대접을 받고 실용 학문이 홀대를 받아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인문학이 진리의 궁구를 위해서나 국리민복을 위해서라기보다 벼슬의 방편으로 추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정말, 과거제도가 없었더라면 유학자 유생의 숫자는 훨씬 적었을지언정 진정한 인문학자가 더 많이 배출됐을지 모르고, 인문학자들이 실용 학문을 연구하거나 권장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조선 민중의 도탄과 조선의 멸망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은 정부에서 실용 학문만을 장려해서 인문학과 기초과학의 존립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번영과 기술의 발전만으로 한 나라가 안정되고 화평해질 수 있을까? 인간 복제가 가능해질 때 무절제한 인간 복제를 자제하게 하는 힘이 과연 과학기술 자체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욕구가 팽창하고 탐욕과 이기가 죄와 타락을 낳는 사회에서, 멸망을 향한 질주를 막을 힘은 순수 인문학의 힘이다. 우리 위정자들이 인문학적 식견과 품격을 갖춘 사람들이었다면 안동수 해프닝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이라는 병은 실용 학문으로 치유할 수 있지만 선진국병은 진정한 인문학의 발전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

서지문 객원논설위원(고려대 영문과 교수)jimoon@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