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류 장편소설
□333쪽 8000원 웅진닷컴
무라카미 류(村上 龍·49)의 소설을 대서특필하는 것은 사실 참신함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매년 꾸준히 소설을 발표하는 그의 다산(多産)이 매번 신작 소개를 부담스럽게 만든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책의 향기’가 류의 최근작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학적 상상력’이 갖는 매혹을 당당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私)소설의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문학의 한계를 환기시켜준다.
이 소설의 얼개는 에스파니아에 있는 어린이 자치공화국 ‘벤포스타’를 떠올리게 한다. 부패한 어른의 세계를 부정하는 17세 소년들이 거대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결성하고 기발한 사업으로 자본을 모은다. 그리고는 일본 홋카이도에 ‘이지메 없는 공동체’ 국가를 세우고 엔화 위기에 빠진 일본의 어른들을 구한다는 내용.
소년 전사(戰士)들이 벌이는 ‘무혈 혁명기’는 얼핏보면 황당하게 보이지만 게임을 즐기듯 한달음에 페이지가 넘어간다. 이런 흥미진진함은 ‘디지털 시대의 유토피아’가 건설되는 과정이 워낙 구체적으로 묘사된데서 비롯된다. 면밀한 자료조사에 기반한 검증과 추론과정을 거친 ‘소설적 시뮬레이션’이 가지는 설득의 힘이다.
‘퐁짱’을 비롯해 소년들이 벌이는 프로젝트는 전개과정이 치밀하다(이 소설의 홈페이지 www.ryu-exodus.com에서 상세한 엑소더스 연대기를 볼 수 있다). 일본의 거품경제가 꺼지자부동산을 싸게 사들여 직업훈련센터를 만들고, 세계적인 뉴스 배급회사를 만들어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키워간다. 그리고 국회 연설을 전세계로 생중계해 경제위기에 빠진 일본을 구하고, 이 연설로 야기된 환율 변동을 이용해 막대한 자본을 손에 넣는 식이다.
이것은 단순히 흥미진진한 유토피아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희망 없는 ‘일본 시스템’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비판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한해 수 백명이 자살할 만큼 만연된 이지메 불감증, 그로 인해 매년 늘고 있는 부등교(不登校) 학생, 속이 곪을대로 곪은 금융시스템의 문제까지 아우른다.
멀지 않은 미래의 일본 경제, 특히 헤지펀드가 엔화를 공격하는 대목이나 국제 통화간의 헤게모니 전개에 대한 통찰력은 ‘소설 경제학’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 정밀하다. 경제 전문 e메일 메거진 ‘JMM’을 몇 년째 운용하는 작가의 취재력이 어느 정도인가 실감케 한다. 소설을 ‘당대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으로 정의한다면 이 작품은 그에 정확히 부합한다. 류가 이 소설을 인터넷에 연재하던 98년은 일본에서 야마이치(山一) 증권사가 문을 닫으면서 금융 패닉 상태에 빠진 때다.
망국론이 팽배하던 당시에 그는 정보통신 기술을 축으로한 글로벌리즘에 대항하는 새로운 네트워크가 일본 경제를 구하리라는 나름의 ‘비전’을 이 소설에 담았다. 이것이 헛된 꿈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듯 ‘시장’이나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손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현 체제의 현실적인 한계속에서 어떻게 인간 소외를 없애고 노동의 가치를 옹호할 수 있을지 고심한다.
현실의 모순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고 이를 해결할 설득력 있는 선견(先見)을 보여주는 것, ‘시대의 예언가’라고 불리는 류가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21세기 소설의 본령인 셈이다. 원제 ‘희망의 나라의 엑소더스(希望の國のエクソダス)’, 2000년작. 양억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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