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영정을 모신 적산법화원 정경
“9세기초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았던 장보고가 우리 역사에서는 1200여년 동안 거의 잊혀져 왔습니다.”(동국대 사학과 윤명철 교수)
1일 중국 산둥(山東)성 룽청(榮成)시 석도진 부근의 적산법화원. 해상왕 장보고기념사업회와 동아일보가 공동주최하는 ‘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지 답사’ 행사에 1차 답사팀으로 참여한 초중고 선생님 67명이 윤 교수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었다.
◇ 적산법화원 곳곳 발자취
적산법화원은 장보고가 828년 이곳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을 위해 세운 절. 이곳 인근의 부두에서 배를 띄우면 만 하룻만에 경기도 쪽 해안에 도착할 수 있어 신라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장보고 영정이 모셔져 있는 적산법화원은 룽청시가 1990년과 2000년 건물을 증축했으며 바로 옆에 장보고 기념비까지 세워져 있는 등 중국 내에서 장보고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다시 동국대 윤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장보고는 이곳을 비롯, 산둥성부터 저장(浙江)성(중국 남부에 위치)까지 중국내에 넓게 퍼져 있던 신라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민간 무역을 독점했던 해상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라로부터 ‘반역자’의 누명을 썼던 그는 죽은 다음 정당한 평가가 받지 못했습니다.”
장보고는 삼국사기, 속 일본서기,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번천문집(樊川文集) 등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인물. 특히 일본 천태종 3대 종정인 엔닌(圓仁)은 장보고 선단이 단순 무역 뿐만 아니라 금융업과 중개업 등을 겸하는 ‘종합무역상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자세히 기록했다.
출생지와 출생연도가 알려지지 않은 장보고는 812년 당나라에 건너가 10여년만에 당나라 군대의 장군이 될 정도로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828년 신라에 귀국해 서남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하겠다는 명분으로 청해진을 세워 군사를 모으고 무역을 하기 시작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
장보고는 이 자금과 무력을 바탕으로 청해진을 사실상의 독립국가나 다름없을 정도로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839년 5000명의 군사를 서라벌로 진격시켜 신무왕을 즉위시킬 정도로 국내 정치에도 깊숙히 관여했다.
그러나 장보고는 841년 염장이라는 부하에 의해 암살당했고 청해진은 10년 동안 유지되다가 결국 폐쇄되고 말았다.
◇ "당대 활약상 피부로 느껴"
전남 담양군 창평중 교사 손미오씨는 “지금까지 잊혀진 인물이었던 장보고의 활약상을 현장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다”면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세계로 뻗어나가야 하는 우리에게 한번 되돌아볼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19일까지 초중고 선생님 183명을 대상으로 5박 6일간 산둥성 일대 장보고 유적지를 둘러보는 형식으로 진행되며 7일 2차 답사팀이 중국으로 향한다.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