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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 다시보기]그가 선택한건 '영원한 자유'

입력 | 2001-06-10 18:42:00

카사노바가 마담 뒤르페와 사랑을 나누었던 파리 인근의 퐁텐블로성.


④감각의 전도사 카사노바

《베네치아의 늦은 오후. 하나 둘씩 불이 켜지는 가로등 밑에서 카사노바와 아리따운 여인과의 뜨거운 밀회를 상상해본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여인을 만날 때마다 매번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 때문에 행복했다”고 했던 카사노바.

아무리 사랑의 귀재라고 해도 그 사랑을 이루는 건 신의 뜻일지 모른다. 카사노바에게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여러 번 있었다.》

20세 되던 해, 베네치아 인근 여관에서 만난 벨리노는 남자가 되고 싶은 소녀 가수였다. 벨리노는 늘 남장(男裝)을 하고 생활했다.

▼글 싣는 순서▼

① 출생과 성장
② 위대한 기록자
③ 코스모폴리탄
④ 감각의 전도사
⑤ 탁월한 벤처사업가
⑥ 맛의 로맨티스트
⑦ 유행을 선도한 베스트 드레서
⑧ 타고난 예능적 기질, 넘치는 끼
⑨ 신념에 찬 계몽주의 사상가

많은 다른 사람들은 벨리노를 남자로 생각했지만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 카사노바는 직관적으로 여자임을 알아차렸다. 남장으로 육체를 가린 소녀의 뜨거운 관능과 섬세한 영혼, 그리고 불행까지 사랑하게 된 카사노바는 결국 벨리노에게 청혼한다.

▼금지된 선 거침없이 넘나들어▼

그러나 직업이 없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감, 여가수와의 결혼으로 인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할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카사노바는 그녀를 놓아주었고 훗날 그녀는 유명한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카사노바가 24세때 4개월간 열렬하게 사랑한 앙리에트도 꿈의 여인이었다. 카사노바는 그녀와의 잠자리를 위해 이탈리아 세네카의 한 여관을 궁전처럼 꾸몄다. 하지만 귀족이었던 그녀는 ‘당신도 앙리에트를 잊게 되겠죠’라는 글귀를 창문에 써 놓고 떠난다.

그로부터 13년 후, 카사노바가 계몽사상가 볼테르를 만나러 가는 도중, 다시 그 여관에 묵었을 때 이 글귀를 보고는 걷잡을 수 없는 우수에 잠긴다. 그녀는 훗날 카사노바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고결한 남자’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카사노바의 흔적을 좇으면서 그 뜨거웠던 사랑의 공간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벨리노, 앙리에트 등과 사랑을 나누었던 18세기의 작은 여관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못내 아쉬웠다.

카사노바는 일생 동안 몇번 결혼의 문턱에 갔지만 그 때마다 자유를 선택했다.

“나는 여자들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나의 자유를 더 사랑했다. 이 자유를 잃을 위험에 처할 때마다 아무리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나는 나 자신을 구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자유는 금지된 선을 거침없이 넘나들게 했다. 그의 고백에서 드러나듯 수녀 M.M과의 정사는 놀랍기 그지없다.

28세이던 카사노바는 M.M에게 7시간에 걸친 열렬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하룻밤에 여섯번의 탄성을 울리게 한 M.M과의 정사는 그녀의 애인 베르니스 공사가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다. 베르니스 공사는 카사노바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사노바가 프랑스로 떠나자 M.M은 더 이상 수녀원을 빠져 나오지 못해 사랑도 끝이 나고 말았다.

36세 때 나폴리에서의 일이다. 17세의 매혹적인 레오닐다와 사랑에 빠져 서둘러 혼인계약서까지 작성했다. 그런 카사노바 앞에 레오닐다의 어머니 루크레지아가 등장한다.

그녀는 카사노바가 19세 때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카사노바는 이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레오닐다와의 결혼을 포기한다. 그렇지만 그날밤, 세 명은 한 방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사랑을 붙태운 퐁텐블로성▼

카사노바의 여인들은 그 사랑이 짧게 머물다 갔는데도 원망하지 않았다. 남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야 했던 카사노바였지만 여인들에겐 결코 파렴치한이 아니었다. 어떤 여인이든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므로 그는 다시 만나고 싶은 남자로 각인됐다.

카사노바의 흔적을 따라 유럽을 여행할 때, 나는 그곳의 여성들에게 물었다. “카사노바가 당신에게 구애를 한다면 응하겠느냐”고. 대답은 모두 “물론!” 이었다.

여러 직업을 거치며 멋진 삶을 추구한 카사노바였지만 상류사회 출신이 아닌 그는 돈에 쪼들리는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10여년 동안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은 한 여인이 있었다. 프랑스의 마담 뒤르페다.

32세의 카사노바에게 후작부인 뒤르페는 자신을 남자로 환생시켜 달라며 7년간 100만프랑에 가까운 재정적 후원을 해준다. 카사노바는 그녀를 남자로 환생시켰주겠다며 돈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평생 여자에게 정직했던 카사노바에게 이 ‘환생의 쇼’는 실로 흠이 가는 이야기다. 마담 뒤르페 사망 이후, 그녀의 조카가 이 문제로 소송을 해 카사노바는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카사노바와 마담 뒤르페가 격정적인 밀회를 즐겼던 곳은 파리 인근의 퐁텐블로성. 200여년전 카사노바처럼 이 성으로 찾아드니, 신분의 차이가 극명한 두 남녀의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태로운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로 인해 오히려 더 낭만적인 사랑이었을가.

이런 일도 있었다. 18세때 프랑스를 여행하던 카사노바는 루이 15세에게 오달리스카란 여인을 소개했다. 그러나 오달리스카는 원래 카사노바의 여인이었다. 후에 이런 사실이 들통나 루이 15세의 괘씸죄에 걸리긴 했지만 카사노바는 국왕을 대상으로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대담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카사노바도 사랑을 잃고 외로움에 빠지게 된다. 벌이도 처세도 마음대로 되지 않자 카사노바는 매춘부를 찾았다. 1763년 런던에서 38세의 카사노바가 매춘부 샤필론에게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리게 되었다. 20여년 간 화류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카사노바가 당한 것이다.

그 때 그는 런던의 템즈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작은 유흥을 한 번만 더 즐기고 죽으라”는 친구의 권유로 카사노바는 자살의 순간을 놓친다. 그날 밤, 카사노바는 익사하는 대신에 여성과 황홀한 밤을 체험했다. 그리고 그 날의 재미로 다시 삶을 이어갔다.

▼신분사회의 가엾은 국외자▼

카사노바의 마지막 여인은 체코 보헤미아에서 만난 엘리사 폰데어 레케였다. 당시 독일의 유명한 서정 시인이자 여행작가였던 40대의 엘리사는 카사노바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1년 동안 정신적 사랑을 나눈 여인이었다.

카사노바는 귀족의 후원에 의존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 발버둥쳤던 신분사회의 가엾은 아웃사이더였다. 어쩌면 여인만이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유일한 성(城)이었고, 침대는 그의 왕국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순간 사람은 연애의 감정을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된다. 그 뒤에는 비극만이 남게 된다”는 까뮈의 말처럼, 50세부터 카사노바의 한탄이 시작됐다.

“나는 깨닫는다. 젊음과 활력이 가져다주는 이유없는 확신과 자신감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었다. 정말 나를 절망케 하는 것은 젊었을 때의 그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카사노바는 전립선 비대증에 걸려 73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30대에 삶을 마감하는 당시 귀족들에 비하면 그는 꽤 장수한 셈이다. 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삶을 살았던 카사노바. 자신의 그런 삶 덕분에 훗날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될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김준목(서양고서사이트'안띠꾸스' 대표)jimkim@antiqu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