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KBS 바둑왕전 본선 대국을 마치고 나온 백대현 4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평소 속기전이라면 누구와 둬도 자신있다며 농반 진반으로 말하던 백 4단은 이날 이창호 9단과의 대국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대의 수법에 의표를 찔려 완패하고 만 것.
이 9단이 흑. 장면도의 흑 1, 3으로 양 외목을 둔 것이 특이한 수. 그러나 이정도까진 기분 전환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진행이다. 하지만 5선에 사뿐히 내려앉은 흑 9를 보고 백 4단은 아찔함을 느끼게 된다.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도 건너지 않는다’는 이 9단이 이런 파격을 서슴없이 시도하다니….
백은 흑의 작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0, 12로 침착하게 지켰지만 흑은 11부터 17까지 중앙을 향해 화려한 비상을 거듭한다.
백 20으로 쳐들어 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 하지만 흑 21로 다가서자 사는 수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백 4단으로선 자신도 모르게 미로에 갇힌 느낌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이 9단이 아무렇게나 두는 것 같았지만 막상 뚜렷한 대책이 없던데요. 흑 9는 흑 A로 평범하게 지키는 것 보다 훨씬 좋은 수입니다. 실전처럼 백이 변에 침입하면 백을 공격하면서 허술한 귀를 굳히고 귀에 침입하면 변을 크게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한 수였어요.”
최근 LG배 세계기왕전의 대역전 우승을 계기로 다시 컨디션을 회복한 것일까. 흑 9는 이 9단같은 초일류 고수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수였다. (프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