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사자상 작가상을 받은 톰블리(미국)의 작품들.
◇서구 문명 매운 비판… 新사조 예고한
아드리아 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카스텔로 공원. 10만평 넓이의 이 공원은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베니스비엔날레가 개최되는 곳이다. 특히 49회를 맞는 올해 비엔날레는 21세기 들어 첫 행사. 베니스비엔날레의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전세계에서 관람객들이 대거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9일 오후(현지시간) 열린 베니스비엔날레 공식 개막식 때는 공원 곳곳이 인파로 가득찼다.
행사장 입구에는 철사를 감아 만든 사슴 모양의 조형물이 배 위에 띄워져 있는가 하면, 바닷가에 세워진 집채 만한 크기의 움직이는 조각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 미술축제다운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한국 작가의 탈락〓9일 개막식에서 베니스비엔날레의 총감독 하랄트 제만(68)이 시상자 발표를 위해 마이크 앞에 섰을 때 참석인사 수백명은 5분여 동안 힘찬 박수를 보냈다. 세계 미술계에서 그의 영향력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시상 결과에서도 그의 노련한 정치적 감각이 다시 한번 발휘됐다. 지난 99년 비엔날레에서 중국 작가들에게 집중적으로 상을 주었다가 거센 비난을 받았던 제만은 이번에는 아시아 작가들을 시상에서 제외하고 대신 미국,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 국가들을 선택했다.
한국이 이번에 상을 받지 못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한국은 이번 비엔날레에서 어느 때보다 수상 기대감이 높았던 게 사실. 각국 미술평론가들이 한국관 출품작가인 서도호와 마이클 주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었기 때문.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이 전체적으로 시상에서 제외되면서 한국도 수상에 실패하고 말았다. 한국 현대미술이 많이 발전하기는 했으나 아직 구미 선진국과 겨룰 정도는 아니라는 자성의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서도호는 프랑스의 유력 미술잡지 ‘아르프레’ 6월호 특집에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수상 가능성 높은 6명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등 유망주로 떠올랐다.
▽세계 미술의 흐름〓‘인류의 지평’이란 주제로 60여개국 120여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이번 비엔날레에는 기존 문명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담은 작품들이 많이 선보였다. 작품을 둘러본 이영철 계원조형예술대 교수는 “서구 젊은 작가들의 자기 문명비판이 무서울 정도로 신랄하다”면서 “이런 경향이 어떤 사조로 발전할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비디오 아트가 강세를 보였으며 작가 두 사람 이상이 공동작업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영국전시관에 출품한 작가 마크 월링거는 죽음과 존재론적 고민을 표현한 대표적 경우. 그의 비디오 작품 ‘엔젤’은 런던 지하철역에서 한 남자가 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아래부분에서 계속 밑으로 걸어내려옴으로써 결국 제자리에 서 있게 된다.
프랑스전시관의 피에르 위그는 못쓰게 된 일본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구입해 이를 이용한 비디오 작품을 만들어 선보였다. 폐기된 애니매이션이 사이버 공간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비적이고 상업적인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규범으로서 재생과 순환의 의미를 강조한 작품이다.
최고상인 황금사자장 국가관상을 받은 독일관의 그레고르 슈나이더는 자신이 사는 집을 압축해 전시장에 재현해 눈길을 끌었다. 황금사자상 작가상을 받은 미국의 사이 톰블리는 전통적인 회화작품을 선보였다.
캐나다관은 조지 밀러와 자닛 카디프의 공동작업으로 만든 소형영화관이 전시장 안에 설치돼 있다. 17명으로 제한된 관람객이 입장하면 헤드폰을 끼고 이 영화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겪을 수 있다. 영화 속 대사 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팝콘 먹는 소리, 웃음 소리,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같이 듣게 된다. 영화 안의 소리와 관객의 소리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 작가는 실재와 환영은 구별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전시장 밖의 행사〓카스텔로 공원 전시장 외에도 베네치아 시내 곳곳에서 여러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베네치아 중심가인 산 마르코 광장에 설치된 이탈리아 작가 플레시의 ‘워터 파이어(Water Fire)’. 푸른색의 시원한 폭포물이 쏟아져 내려오는가 하면 붉은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전광판 영상 작품으로 관광객들에게 좋은 볼거리가 되고 있다.
메인 전시장 옆 야외에는 한국 이스라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 전쟁을 경험한 4개국의 작가 8명이 참가하는 ‘노 휴먼’전이 열리고 있다. 전쟁의 참상을 다룬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에서는 심문섭(중앙대 교수) 박선기(재 밀라노 작가)씨가 참가했다.
jky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