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오늘 참으로 가슴이 메이고 뜨거워지는 감동을 맛보았소이다. 여기 계신 일등공신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 자신들 스스로 모든 권력의 요직에 앉지 않겠거니와 조정의 큰 일에 간섭하지 않겠음을 밝혔소이다. 이 어찌 쉬운 일이겠소이까.”
‘국민 드라마’로 자리잡은 KBS 1TV ‘태조 왕건’은 지난 일요일 개국 공신 책봉 장면을 내보냈다. 이 대사는 왕건 역 최수종의 입에 오르기 전, 작가 이환경(李煥慶·51)의 입에서 먼저 토해졌다. 대본 구술을 통해서다. 머릿 속에서 폭발하는 고려의 기상이 컴퓨터 치는 손가락의 속도를 따르지 못해 그는 종종 입으로 대본을 쓴다.》
“무당이 공수내리는 식이죠. 왕건 대사를 할 때는 내가 왕건 목소리를 내요. 신기(神氣)가 씌여서 아주 그 인물이 돼버리는 거예요.”
2000년 4월 1일 첫방송 이래 두어차례를 빼놓고는 한번도 시청률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전대미문의 드라마를 쓰고 있는 그는 이날 장면에 대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했다.
“1등 공신들이 모두 평민이라는 점 등은 사실(史實)에 근거한 것이지만 전후상황은 의도가 담긴 상상력의 산물이예요. 좀 봐라, 하는 뜻이지. 정사를 바탕으로 쓰는 사극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는 혁명주체세력이나 가신그룹이 다 해먹지 않았어요.”
# ‘저주받은’ 작가의 하루
그는 자신의 삶을 “글쓰고 술먹고, 글쓰고 술먹고”라고 표현했다. 새벽 다섯시쯤 일어나 밥한그릇 국에 말아 후룩 먹고는 서울 목동 작업실로 간다. 일주일에 이틀은 플롯을 정교하게 짜는 날이고 나머지 날엔 무조건 쓴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날도 마찬가지였다. 원고지로 따지면 하루 120장 정도. 두어시간 컴퓨터를 두드리고 나면 답답증도 나고 어깨와 팔목이 아파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때부턴 구술이다. 작가가 왕건이 되고, 견훤이 되고, 자신이 사랑했던 궁예가 되어 삼한을 호령한다.
오후 두세시쯤 되면 진이 빠져 더 쓰라고 해도 못쓴다. 작품할 때마다 이가 빠질 만큼. 잇몸이 들썩거리다가 ‘용의 눈물’ 때 두대, ‘왕건’ 들어서 벌써 두대가 나갔다. 그래도 안쓰면 초조해지니 작가란 저주받은 직업이란 생각도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호령했던 삼한을 뒤로 하고 근처 재래시장 순대국집을 찾는다. 소주 두세병 정도는 가볍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 지난 봄 ‘가슴에 풍선넣는 수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술은 못줄인다. 내장탕 낙지 곱창 장어만 사양할 뿐. 의사는 그가 좋아했던 것들은 다 먹지 말라고 했다.
집에 오면 취한 상태에서 러닝머신 위를 뛴다. 역시 의사의 권유에 따라서다. 시간이 아까워 TV뉴스를 보면서 뛴다. “뭐? 왕기(王氣)서린 곳으로 부모 묘를 옮겨?” 흥분을 할 때도 있지만, 뛰니까 확실히 몸이 좋아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뿐하다.
그에게 가장 화려한 날은 월요일이다. 오전이면 ‘왕건’이 녹화되는 방송사를 찾아 제작진도 만나고 점심부터는 20년 친구인 안영동 부주간(‘왕건’책임프로듀서)과 함께 회의 겸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화면 좀 웅장하게 해줘. 돈 아끼는 거야, 뭐야.” 잔소리도 해가면서. 기자가 이환경을 만난 날도 월요일이었다.
# 역사는 오늘의 거울
1년전 이맘 때 그는 ‘왕건을 기다리며’라는 칼럼을 썼다. 2000년 6월15일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다음이었다. 1400여년전 신라에 의해, 그리고 1000여년전 고려에 의해 이뤄진 두번의 한반도 통일드라마. 고려 태조 왕건은 셋으로 갈린 나라와 함께 지역갈등이 심했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까지 하나로 묶은 현명한 임금이었다. 세번째 통일을 준비하는 이 시대,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왕건을 기다리고 있다고.
“꼭 1년전인데 분위기가 너무나 많이 바뀐거 아닌가요. 왕건이 되기를 기대했던 사람들도 그렇고…”하고 기자가 운을 뗐다.
“이런 얘기를 하면 건방지다고 할텐데. 역사는 한치도 틀리지 않아요. 정권을 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백성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지만 여간해선 사람의 그물, 집단이익의 그물에서 못벗어나요. 1000년전의 역사가 조선 이방원의 시대에,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는 거죠. 내 드라마를 정치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보겠지만, 마찬가지예요. 아마 대부분 자기가 왕건이라고 여기며 보겠지. 하하.”
그가 ‘왕건’을 드라마로 쓸 생각을 한 것은 1997년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사태로 온나라가 시름에 빠졌을 무렵이었다.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통일하고, 세계최강대국 몽고에 맞서기도 했던 멋진 나라가 고려 아닌가. 지친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안겨주면서 21세기 화해와 통일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고 싶었다. 방송가에서 ‘남들이 안하는’ 고려사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도 강했다. 국역된 고려사는 외울 만큼 봤다. 국내 논문은 물론, 중국 옌볜까지 가서 자료를 구해봤다.
그가 강조하는 왕건의 모습은 덕이 있는 군주다. 민심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것을 알고, 기득권을 포기한 채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임금이다. “지금 왕건같은 리더가 필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며 “왕건은 합리주의자일 뿐 아니라 인간경영을 잘한 임금이었다”고 말했다.
“군주에게 필요한 첫번째 인물이 책사(策士)예요. 나라가 죽고사는 게 책사에게 달렸어요. 리더의 주변엔 충성하는 사람과 머리를 써주는 사람이 있는데 충성하는 사람에게 기대는 군주는 망할 수 밖에 없어요.”
그가 지극한 애정을 기울였던 인물이 궁예의 책사 종간이었다. 끊임없이 권고하고, 어떤 악조건에 몰려도 군주를 옳은 길로 이끌려 애썼으며 종국에는 군주와 함께 죽었다. 그러나 이환경이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왕건이 죽을 때 나와요. 모든 걸 다 이룬 황제인데 죽을 때 그랬어요. ‘참 허망하다’고. 사료에 기록된 말이예요. 권력무상. 인생은 뜬구름 같은 것인데 무엇을 위해, 왜 그리 집착했는가 덧없어하는 거지요.”
무엇하나 부족할 것이 없었던 황제가 허망했다면, 그럼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욕심을 비워야죠. 권력이나 명예를 위해 인간이 목숨을 거는데, 사람들이 자기만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죽을 때 허망한거지. 마음 비우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게 난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 남자의 세계, 남자의 드라마
KBS가 기네스북에 올릴 것을 검토 중인 이 드라마의 인기비결은 한마디로 ‘싸나이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왕건’은 강력한 카리스마, 의리 충성 조직과 같은 ‘남성적 가치’를 통해 남성 시청자들을 빨아들인다.
“모든 남자들이 좋아하는 공통분모가 카리스마예요. 의리 충성 조직 생과 사, 이런 극적인 단어에 남자들이 목숨을 걸어요. 깡패조직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걸 소화할 수 있는 기술이 나한테 있어요. 내가 오만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이예요. 남성 시청자들이 이런 세계에 굶주려있다고 봐야죠.”
그는 들풀처럼 거칠게 살았던 젊은날, 이같은 남성의 세계에 눈을 떴다. 부친이 부역혐의로 형을 살고 나온 뒤 집안은 풍비박산했다. 초등학교 때 벌써 아이스케키 장사를 시작해서 서른두살에 방송작가가 되기까지 엿장수 고물상 막노동까지 100개가 넘는 직업을 거쳤다. 몸집은 작았지만 그에겐 독기가 있었다. 힘과 조직, 의리와 충성은 생존의 본능이었다.
야생마로 밑바닥을 달리면서도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너는 글짓기를 아주 잘하는구나”하고 말해준 시인 선생님. 언젠가 작가가 되겠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이자 삶의 버팀목이었다. 책에 중독된 그에게 그가 잠자는 고물상 천막집은 헌책으로 가득찬 도서관이 됐다. 사람사는 원칙,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책에서 배웠다.
험난한 세상을 잔인하게 살도록 내쳤던 하늘은 그래도 기회를 던져줬다. “이걸 잡으면 살텐데, 살아볼래? 그냥 죽을래?” 하고. 보일러 기능공으로 일하던 어느날, 신문쪼가리에서 KBS작가 워크숍 공고를 봤다. 이듬해인 83년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에 합격했다.
하지만 글로 먹고살기까지는 10여년의 고단한 생활을 견뎌야했다. 게다가 그가 ‘천사’라고 여기는 아내가 암에 걸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대수술받은 집사람 병원에 뉘여놓고, 아이들 도시락 챙겨주는데 갑자기 뒤통수를 탁 맞고 깨어나는 것 같더라구요. 사는 게 이게 아니잖아, 깨달은거지. 나 혼자 글만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내가 살수 있었다는 거.”
그가 ‘천사’라고 부르는 아내와 가을에 캐나다로 요양을 떠날 생각이다. 가장 소중한 게 뭔지 알았으면서도 가족이나 사랑에 관한 드라마는 못쓴다. 비위에 안맞아서. 내년부터는 고려 4대왕 ‘광종’을 쓸 준비를 다 해놓았다. 대선과 맞물리는 2002년엔 나라의 안정이 시급하다고 내다보는 까닭이다. 길게보면 역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인 것. 드라마를 통해 강한 나라, 강한 지도자, 강한 백성을 복원시키겠다는 그의 사관(史觀)엔 시퍼런 칼날이 번득이고 있었다.
▼이환경의 말…말…말…▼
△아직은 모를 일이다〓지금 ‘왕건’이 보이느냐는 질문에. “안보인다고 하기에도 그렇고…”라고 덧붙이면서.
△그램(g) 수로 재면 깡패조직이나 정치권이나 똑같지〓의리와 충성이 없으면 조직이 존재할 수 없다면서. 다른 것은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이익이나 명분 뿐이라는 설명.
△남자는 명예욕, 여자는 허영욕〓남자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여자는 목숨까지는 못건다며.
△옛말 틀린 것 하나 없죠〓힘세고 인정많은 견훤이 무너진 것은 가정을 못다스렸기 때문이라며 가화만사성 치국평천하(家和萬事成 治國平天下)을 강조.
△띄워줄 때 본 모습이 나오더라〓잘나간다 싶으면 오버페이스하는 연기자가 많다며. 그런 점에서 최수종은 겸손하고 자기관리 잘하는 진짜 배우라고 칭찬.
△실패한 인물에게 애정이 가요〓극중 인물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은 종간과 궁예라며.
△독서량이 작가의 생명을 좌우한다〓젊은시절 고물상에서 기거하면서 읽었던 헌책들이 지금 육화돼 글로 나온다며.
△어짜피 ‘센 놈’이 이기는 법〓학력이 낮아 방송가에서 수모를 당한 적이 없느냐는 질문에.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너무 힘들 게 살아왔다며. 그러나 윤회의 업때문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역시 작가를 할 것이라고.
△아이고, 절대 안나가요〓정치권에서 손짓하면 어쩌겠느냐는 질문에 백정이 푸줏간 떠나서는 죽는 법이라며.
▼이환경씨는…▼
△1950년 인천 출생
△1962년 인천 주안초등학교 졸업
△1982년 KBS TV문학관 ‘갯바람’으 로 작가 데뷔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 오 부문 당선
△‘전설의 고향’(86-88년) ‘무풍지 대’(88년) ‘훠이훠이’(89년) ‘파천 무’(90년) ‘적색지대’(91년) ‘비 검’(93년) ‘역사의 라이벌’(94-95 년) ‘용의 눈물’(97-98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