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들이 정치자금의 출처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 몇 년째 미적거려온 자금세탁방지법 입법이 늦어지고 있다. 여야간에 일시 ‘이상한’ 타협안이 나오는 듯하더니 다시 번복되어 원점으로 돌아갔다. 18일 여야 원내총무 등 9인소위가 ‘법안에서 정치자금을 빼되, 계좌추적은 제한 없이 할 수 있게 한다’고 잠정합의했으나 19일 한나라당이 ‘계좌추적만은 안된다’며 당론으로 이를 뿌리쳐 버린 것이다.
민주당은 20일 ‘정치자금도 포함하고, 계좌추적권도 부여’하는 당론을 확정, 야당과 타협을 시도하고 안되면 28일 표결처리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민주당도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동안 정치자금 제외를 위해 당내에서 엎치락뒤치락해온 데다 이번에도 ‘한나라당측이 정치자금 포함을 극구 싫어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슬그머니 거기에 편승하려 했기 때문이다.
정치자금을 빼버리면 당연히 ‘구린 돈’을 합법적인 정치후원금으로 가장하거나 은닉하는 경우 처벌하기가 어려워진다. 지금까지 숱한 정치자금 관련 수사가 세탁자금에 대한 계좌(돈줄)를 완전하게 밝히지 못한 채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한나라당은 20일 정치자금을 포함하되, 이 법에 따라 세워지는 금융정보분석원(FIU)이 정치자금의 계좌추적을 할 수 없도록 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야당 돈줄에 대한 뒷조사와 탄압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의총에서 나온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돈줄이 막히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계좌추적만은 안된다’는 발언도 보도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여론의 지탄을 면키 어렵다. 우선 조직범죄나 마약사범 처벌을 위해서도 돈세탁을 밝히는 것이 필요해서 법을 만드는 것인데, 그 범죄차단을 위해 불가피한 계좌추적권한을 정치자금 때문에 ‘원천 봉쇄’하자고 나서면 국민이 용납하겠는가.
현재 미국 등 50여 나라의 FIU가 불법 금융거래에 국제협력 체계를 갖추어 계좌추적을 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계좌추적이 안된다면, 금융기관이 법에 어긋난 금융거래를 파악하더라도 FIU가 계좌추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구린 돈’의 실체를 확인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권이 정말 ‘구린 돈’과의 결별 의지가 있다면, 그리고 시대와 국민의 요청에 부응하는 의미에서라도 구차스러운 꼼수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