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엔 ‘교훈’과 ‘급훈’이 있다. 교훈이 학교의 역사와 같이 하는 것과 달리, 급훈은 한 학년 동안 유효하다. 그래서 급훈은 담임선생이 바뀌면 즉시 바뀐다.
담임선생의 교육철학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게 급훈이다. 그러니 어려울 수밖에. 튀는 세대 앞에 걸어놓는 거라면 더하다. 몇몇 선생님들은 아예 그럴듯한 글귀를 하나 골라 평생 써먹기도 한다.
그건 그렇고, 올해는 뭘로…. 아예 아이들한테 정하라고 할까? 자, 모두들 급훈 하나씩 써 와! 놈들, 그것도 숙제라고 절반 이상이 해오지 않는다. 그나마 해왔다는 것들이….
‘금연’ ‘죽도록 공부하자’ ‘Cap이 되자’ ‘대빵 멋지게’ ‘오늘도 무사히’ ‘맞은 자리 또 맞지 말자’ ‘안 웃겨도 웃자’ ‘우리는 짱, 우리반은 짱반’ ‘학생은 왕이로소이다’ ‘萬水無江’(萬壽無疆은 우리 애들에겐 좀 무리) ‘공부도 백점, 운동도 백점, 우리는 야쿠르트 어린이!’ ‘왔노라, 보았노라, 잤노라’ ‘더 큰 사람이 되자’(참고로 우리학교 교훈은 ‘큰 사람이 되자’다).
나중엔 녀석들 ‘신성한 교실에서 코 후비지 말자’ ‘디아블로를 척살하자’ ‘선영아 너 미워’ ‘울다가 웃지마라, 똥구멍에 털난다’ ‘연필부인 흑심 품었네’에 ‘자지(?) 말자’까지….
다른 반은 어떤 것으로 했나 훔쳐본다. ‘근면, 성실, 창조’ ‘무실역행(務實力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내가 먼저’ ‘최고보다 최선을’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공부하자’ ‘스스로 자유로워라’는 그런 대로 갓 구운 냄새가 난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K선생님 반, ‘집념’은 악다문 입술의 H선생님 반, ‘Honesty’는 영어선생님 반, ‘思無邪’는 한문선생님 반의 급훈이 틀림없다.
급훈 자리에 시계가 걸려 있는 반도 있다. 아이들 설명. “우리반 급훈은 ‘시간은 금이다’예요. 시계 테두리가 누런 금이잖아요.”
세상엔 참 좋은 글도 많다. 말도 많고. 1년 만에 폐기처분할 게 아니라 평생 새겨야 할 글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닌가. 이 좋은 글들을 매일 쳐다보는 아이들은 왜 1년 내내 고 모양들인지. ‘웃으며 공부하자’ 반에선 오늘도 단체기합을 받을 게 뻔하고, ‘늘 깨어있자’ 액자 아래에는 코 박고 침 흘리는 놈들 투성이일 거다. 머리 박고 자느라 쳐다볼 새도 없겠지만….
하긴 애들이 책 없어 공부 못하고, 이 세상이 말 잘하는 사람 없어 이 모양이겠는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생님의 좋은 말이나 선생님이 쓴 급훈이 아니라 바로 선생님의 따뜻한 시선이 아닌가 한다. 잘못하다 선생님 머리나 깨지지 않게 ‘급훈 액자’나 단단히 잘 박아놓고 볼 일이다.
전성호(41·휘문고 국어교사)ohyeah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