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서 새로 생긴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지하철 안에 매달린 텔레비전이다. 처음 그 텔레비전이 설치될 때만 해도 지루한 출퇴근 시간을 심심찮게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정 할 일이 없으면 텔레비전을 시청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텔레비전이 방영을 시작하자마자 그게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 지하철 텔레비전은 명화를 보여주는 것도, 뉴스를 전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루 종일 맹목적으로 광고만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하루는 광고만 토해내는 텔레비전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저 물건이 왜 지하철 안에 달려있어야 하는가 생각해봤다. 단순한 이유였다. 텔레비전을 설치하면 광고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지하철 출입구마다 달아놓았다. 그러다 보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게 됐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광고를 더 많이 방영해야만 한다.
하루 종일 광고만 토해내는 텔레비전이라는 놀라운 아이디어는 바로 이런 악순환에서 비롯한 것이다. 결국 그 텔레비전은 지하철 승객을 모두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 속셈이다. 혹시 아는가, 어느 날 갑자기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햄버거가 먹고 싶을지. 혹은 주말에 영화나 한 편 봐야겠다고 느낄지. 도대체 나는 비싼 돈을 들여 왜 이런 짓을 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은 결국 우리가 그 광고라도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신문이나 책을 읽는다. 혹은 옆 사람과 얘기를 하거나 잠을 잔다. 이 모든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지하철 상단에 부착된 광고를 읽는다. 사실 광고만을 틀어주는 텔레비전이라는 아이디어가 현실화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제 혼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 현대인에게 그 일은 뭔가 걱정이 있다는 뜻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한 방향을 바라보게 됐다. 텔레비전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광고방송을 보기 위해.
처음 달리기에 익숙해졌을 때, 가장 난감했던 일은 매일 한 시간씩 내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달리는 동안에 신문을 읽거나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처음에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들었지만,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것도 포기했다.
그러고 나니 참으로 혼자서 마음놓고 생각할 수 있는 막막한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내게 주어졌다.
내가 생각하는 일에 얼마나 서투르냐 하면, 처음에는 그 시간 동안 부단히 뭔가 생각해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달리는 동안 해결해야만 하는 일의 해답을 찾겠노라고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해답은 절대로 찾지 못했다. 내 생각의 지속력은 불과 30초를 넘지 못했다. 나는 끊임없이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혼자서 한 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보내는 일에 서투른 것은 당연했다. 달리는 일보다는 시간을 보내는 일이 지겨워 달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면 대충 이해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도통(道通)까지는 아니지만 드디어 나는 한 시간을 정말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됐다. 달리면서 이제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게 됐다. 대신에 오감(五感)이 점점 열렸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서있는 아카시아 나무 가지들이 생생하게 눈으로 들어왔다. 땀으로 젖은 살갗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전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던 새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으로 흘러가는 한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매일 두 시간을 지하철 안에서 보낸다. 어떤 날은 그 두 시간 동안 내가 경험한 것이라고는 신문 한 부에 실린 이야기와 텔레비전에서 반복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광고뿐인 경우도 있다. 두 시간 동안 한 경험이 그것뿐이라는 점, 게다가 내가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니라는 점은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땀을 흘리며 달리는 이유, 혹은 지하철에 매달린 텔레비전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나만의 오감과 판단과 경험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김연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