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올림픽'서 실력 인정받아 뿌듯
“저는 이번 대회에서 너무나 남성적이고, 너무나 여성적인 한 커플의 춤을 봤습니다. 그런 제자를 둔 마리나 레오노바(전 볼쇼이 발레단 주역) 여사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뜻을 전해요.”
‘모스크바 국제발레 콩쿠르’가 끝난 후 키로프 발레단의 주역무용수였던 안드리에스 리에파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축하의 뜻을 전한 ‘마리나 레오노바’라는 사람은 내가 볼쇼이 발레학교에서 공부했던 시절 담임 선생님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번 콩쿠르에 참가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리 팀은 물론, 한국 발레가 발레 종주국 러시아에서 인정받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러시아는 기회의 땅이자 고통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나는 14살 철부지 때 발레를 배우겠다며 이 곳을 찾았다. 5년 간.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그 어린 소녀에게는 어쩔 수 없이 발레가 전부였다.
사실 이 대회에 앞서 나는 한국에 이미 많은 팬들을 갖고 있는데 콩쿠르 참가가 부담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하지만 발레 수업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러시아에서 열리는 이 ‘발레의 올림픽’은 내가 꼭 밟고 싶었다.
이번 대회에는 주니어부가 76명, 시니어부가 100명 정도 참가했다. 출전 순서를 정하는 제비뽑기가 있었는데 나는 시니어부에서 4번째였다. 나는 국립발레단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이)원국 오빠와 파트너를 이뤄 참가했다.
예선에서 클래식 발레 ‘지젤’과 창작 ‘윈터 비전’, 준결승에서 ‘백조의 호수’의 ‘흑조’ 파드되와 창작 발레인 ‘바리’를 췄다. 콩쿠르는 공연 때와 달라 짧은 시간에 한치의 실수도 없이 최고의 기량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밀려왔다. 볼쇼이 극장의 15도 이상 경사진 무대 바닥에 적응하는 일이 큰 과제였다. 우리는 예선에서 적응이 잘 안됐으나 17일의 결승 무대에서는 그런대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18일 새벽 3시 내가 여자 동상, 원국 오빠가 비출전자임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 17명의 만장일치로 ‘베스트 파트너 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날 오후 볼쇼이 극장에서 많은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상식이 있었다. 내가 전설적인 발레 스타들과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 같은 훌륭한 예술가들이 주인공이었던 그 무대에서 춤췄다는 사실만으로 감동이 느껴졌다.
이번 대회에서는 우리 팀 외에도 중국 팀이 여자 금상과 남자 동상을 수상했다. 최근 국제콩쿠르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동양권 발레의 급성장이 확인되는 무대였다.
나를 모스크바 콩쿠르로 인도해준 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과 유리 그리가로비치 선생님, 그리고 나의 파트너 원국 오빠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국립발레단 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