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이 쓴 ‘세상을 어둡게 보는 법’은 흥미로운 책이긴 하나 지독하게 사변적이다.
세상을 어둡게 보기 위해 그렇게 복잡다단한 사색의 실타래를 풀어가야 한다면 차라리 무작정 세상은 밝은 것이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면서 낮잠 자는 게 나을 성싶다. 내가 세상을 어둡게 보는 법을 터득한 것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다.
밝음 뒤에 숨겨진 어둠이 있고 그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세상의 법칙은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른바 ‘필름 누아르’라고 불리는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서다. ‘대부’ 3부작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 이 장르의 원류에 위치해 있는 영화가 ‘말타의 매’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바바리 코트 깃을 세우고 중절모를 깊숙히 눌러쓴 이 사내는 시궁창에서나 들려올 듯한 탁한 목소리로 냉소적인 대사들을 툭툭 뱉는다. 그는 정의니 사랑이니 하는 따위의 입에 발린 가치들을 믿지 않는다.
그는 어둠 속에 관철되고 있는 세상의 법칙을 훤히 꿰뚫고 있으며 그 위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비겁하지도 않지만 무모하지도 않다. 요컨대 그는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보며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용하나 확실하게 움직인다. 이 우아한 표범 같은 사내가 ‘말타의 매’에 등장하는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험프리 보가트)다.
‘말타의 매’는 필름 누아르의 모든 원형들을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다운 의미의 고전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거짓된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는가를 새삼 깨달으면서 혐오감과 씁쓸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대로 침잠해버린다면 살아남지 못한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한탄하느라 사냥을 멈추는 표범은 없다. 그가 사냥에 나서는 것은 정글의 왕자가 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는 살아남기 위해 움직인다. 샘 스페이드는 냉철함과 영민함, 그리고 사악함이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는 캐릭터다.
대부분의 필름 누아르에는 팜므파탈, 곧 매혹적이되 치명적인 여인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말타의 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이 영화도 베일에 싸인 신비의 여인 브리짓 쇼네이(메리 애스터)가 샘 스페이드에게 사건을 의뢰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말타의 매’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캐릭터가 변주하는 멜로라인 혹은 맞대결이다. 샘 스페이드는 브리짓 쇼네이에게 매혹된다. 그러나 그녀에 의해 파멸 당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녀를 단죄한다.
자신을 매혹시킨 여인에게 격정적인 키스를 한 다음 “너를 감옥에 보낼 거야, 나올 때쯤에는 할머니로 변해 있겠지?”라고 무표정하게 말하는 남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사악할 만큼 쿨한 남자가 샘 스페이드다. 영화 속에서나 현실 속에서나 줄곧 여자들에게 끌려 다니기만 했던 나 같은 관객들이 내심 쾌재를 부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대목이기도 하다.
샘 스페이드는 일그러진 영웅이다. 그래도 이 장르의 후속 주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차이나타운’의 제이크 기츠나 ‘보디히트’의 네드 라신이 보여주는 무기력함이나 파멸에 비한다면 차라리 그의 일그러짐이 보다 더 강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샘 스페이드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은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개척자인 대쉬얼 해밋이다. 그가 남긴 긴 그림자를 보며 이 장르의 완성자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경구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자라면 이 비열한 거리를 통과해 걸어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심산 besmart@nets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