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서 있는 사람조차 꾸벅꾸벅 조는 나른한 여름이다.
정류장을 막 출발하려는 순간 “개굴아!” 하는 소리가 적막을 깬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단잠을 깬 사람들, 무슨 일인가 싶어 버스 안을 둘러본다. 한 남학생이 창 밖을 향해 다시 소리지른다. “개굴아!”
승객들의 시선은 일제히 창 밖으로 날아가고, 인파 속에서 한 녀석이 유유히 손을 흔든다. 난 조용히 미소짓는다. 달콤한 오수를 깨운 문제의 그 학생은 진짜 개구리(?)였기 때문이다.
해마다 600∼700명씩 되는 학생을 맞고, 또 보낸다. 아무리 기억력이 비상하다 해도 그 많은 아이들 이름을 어찌 다 외우리. 설사 외웠다 해도 졸업한지 한참 지난 어느 날 불쑥 찾아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면 난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탁’ 보는 순간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거 참 문제다.
“가만있어라. 네가 몇 회지? 누구 동기더라? 어어, 그렇지. 군대는 갔다왔고? 그래, 지금 뭐해?”
관심 있는 척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퍼부으며 살살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그리곤 ‘이놈 이름이 뭐더라…’ 머릿속은 기억의 수첩을 뒤지느라 정신 없다.
어디 졸업생뿐이랴. 교문 앞에서 무단횡단을 하던 학생을 붙잡고 “너 몇 학년 몇 반이야?” 했더니 “선생님 반인데요” 했다는 어느 선생님의 일화도 있다. 어찌됐든 선생님이 아이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 세계에선 진짜 이름보다 그들만이 아는 또 다른 이름이 더 잘 통한다.
째째파리(남자가 10원땜에…), 얼큰이(얼굴이 크다), 절묘(생긴 모습 그 자체), 뻑지(뻑하면 지랄), 똥껍질(?), 까댐맨(뭐가 그리도 불만이 많은지), 재트방하(재채기, 트림, 방귀, 하품의 달인), 소공년(소중한 공부시간에 ××만 만지고 있는 녀석), 그리고….
‘황○○!’
그 놈의 이름은 ‘황보△△’다. 흔치 않은 성이라 이름 대신 ‘황보’로 통했다. 녀석은 떠들고 있거나, 엎어져 자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날도 애들은 떠들었고, 황보는 역시 돋보였다.
한참 칠판에 뭔가를 쓰고 있는데 하도 떠들기에 무심결에 휙 돌아보며 “누구야? 떠드는 놈. 황보지?” 했더니 한 놈이 “어? 무슨 ○○?” 하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아이들은 뒤집어졌고, 놈은 본의 아니게 학창시절 내내 그 별명을 갖게 됐다.
나 때문에 생긴 별명이 하필 좀 그랬지만, 어찌됐든 황○○는 십년, 아니 몇 십년이 지난 후 날 찾아와도 단번에 ‘척’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와의 추억을 기억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아, 보고싶은 그들이여. 부르다 내가 웃다 죽을 이름이여!
전성호(41·휘문고 국어교사, ohyeah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