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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포럼]안병영/지역주의에 돌을 던져라

입력 | 2001-06-28 18:57:00


얼마 전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동료 교수 한 분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다. 화제가 정치에 이르렀는데 그분이 느닷없이 “안 선생, 한국정치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물었다. 그러고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게 ‘크로니즘(cronyism)’이 아닙니까. 연고주의지요”라고 내뱉듯 자답(自答)했다. 30년 이상 대학 교단에서 정치학을 가르친 원로교수의 한국정치관(觀)이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내 뇌리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꽤 여러 해 전이라고 생각되는데 대학 연구소의 주선으로 북한에서 월남한 인사 6명과 대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중에는 탈북자도 있었고, 간첩으로 넘어왔다가 잡힌 사람도 있었다. 동유럽에 유학했던 젊은이도 있었고, 중국에서 대외무역에 종사했던 사람도 있었다. 연령층도 다양했고 북한에서의 사회적 배경이나 남한에 발을 딛게 된 시기와 동기도 가지각색이었다.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다가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적응하자니 어려움이 많지요?”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고 그 내용은 얼마간 충격적이었다. “실제로 체제나 이념은 생각처럼 큰 문제가 안돼요. 조금 살다 보면 익숙해지는 걸요. 문제는 우리들이 하늘에서 별안간 떨어진 존재라는 거예요. 한국은 연줄사회인데, 저희들은 이곳에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 살기가 여간 고달픈 게 아니죠.” 한 젊은이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이들이 모두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죠?” 그러자 다소 늙수그레한 사람이 대답했다. “하는 수 없지요. 살아남자면 저희도 열심히 연고를 만들어야지요. 장가를 들면 처가가 생기고, 교회에 나가면 교회형제들이 생기죠. 그런 식으로 연고를 구축해 나가는 거지요. 이제 10여년이 되니 이력이 나서 견딜 만합니다.” 이것이 월남인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일련의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우리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 민주화되면서 한국 정치문화의 ‘트레이드마크’인 권위주의는 점차 수그러드는 추세이다. 그러나 연고에 집착하는 집단적 인맥주의는 세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승을 부리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 있는 영역이 정치이고, 그 중 가장 우려되는 것이 지역주의일 것이다.

한국정치의 균열선은 계급이나 계층과 같은 사회경제적 차원에 의해 그어진다기보다, 오히려 지역에 의해 그어진다. 지역적 연고는 이념의 벽도 뛰어넘는다. 그런 의미에서 60년대 이후 한국 정치사는 ‘지역주의 승리’의 역사였다. 역대 집권자들은 지역감정을 이데올로기화하여 정권 연장과 쟁취에 이용했고, 국민은 부지불식간에 지역주의의 포로가 됐다. 민주화가 진척됐다지만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고 있다. 김대중 정권의 경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깊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지역주의의 병폐가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데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의 계절이 다가올수록 정치인들은 벌거벗은 권력욕과 눈앞의 목표에 더욱 집착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비(非)이성과 정한(情恨)의 정치가 난무할 것이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에도 지역주의를 악용한 갖가지 정치적 공작이 커튼 뒤에서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역주의 망령 앞에서 너무나도 패배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떤 이는 지역주의를 이미 ‘돌이킬 수 없는’(불가역·不可逆) 한국정치의 현실적 단면으로 인식하고, 한국정치는 좋든 싫든 지역주의의 구도 위에서 짜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지역갈등이 매우 심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정치나 사회를 규정하는 숙명적인, 그리고 극복이 무망(無望)한 ‘구조적’ 요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개선될 수 있는 가변적 요인이다. 또 그것은 한국정치의 근대화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넘어야 할 마지막 준령(峻嶺)이다.

내년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유권자와 시민사회에 부과된 제일의 역사적 소명은 지역주의 승리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지역주의를 이용하고, 그 구도 위에 한국정치의 집을 지으려는 모든 세력과 정치인에게 반드시 패배를 선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뜻 있는 국민과 시민단체는 총궐기해야 한다. 지역주의와의 싸움에서 더 이상 한치도 물러설 자리가 없음을 마음에 깊게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안병영(연세대 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