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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유종호]글쓰기와 언어

입력 | 2001-06-29 18:33:00


▼'문학이란 무엇인가' 장 폴 사르트르 지음/정명환 옮김/444쪽 9000원/민음사▼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남루한 청춘과 추억의 책이다. 휴전이 되었다고는 하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대한 불발탄 아래서 살고 있다는 불안감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초월자도 이데올로기도 이승만 정부도 믿을 수 없었던 50년대 중반의 우리들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영문모를 믿음만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고문서만 뒤지다가 결딴난 식민지에서 태어난 철부지답게 우리는 또 새 것 속에 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커다랗게 떠오른 새 이름이 사르트르이다. ‘구토’는 소설 발전의 예고 지표이며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마스터하면 거칠 것이 없으리라는 망상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제나 그제나 날라리 후진사회에서 항상적으로 창궐하는 혹세무민의 뜬 소문 탓이었을 것이다.

▼"산문가도 말에 봉사해야"▼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산문 작가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참여’를 호소하고 있는 격문서(檄文書)다. ‘누구나 모든 것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 조시마장로의 말을 문학과 작가에게 적용하여 부연 확대한 이 책은 소홀치 않게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독자에게 인지의 충격을 주는 대목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가령 ‘오오 계절이여! 오오 성이여?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란 랭보의 절창 대목을 인용하고 나서 말한다. 여기서는 누가 질문을 받는 것도 질문을 하는 것도 아니며 시인은 그 자리에 없고 오직 절대적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그리하여 이제는 하나의 상식으로 굳어진 명제가 제시된다. ‘이리하여 틴토레토의 고뇌가 노란 하늘로 되었듯이 물음이 사물화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의미가 아니라 실체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술이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라는 미국 시인 머클리쉬의 대목에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또 기호의 촉지성(觸知性)을 높이고 기호와 대상물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를 증진시킨다는 야콥슨의 ‘시적 기능’ 정의와도 근접해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시인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절한 사람이요 산문가는 말을 사용하고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이분법은 차이성 부각을 위한 방법적 과장이지 만능의 잣대는 아니다. 상징주의의 시 전통 아래서 말라르메나 랭보에서 시의 모형을 구상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또 ‘산문작가는 기호를 모아 엮는 사람이지만 그 경우에라도 말의 물질성과 말의 불합리한 저항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하다면 그의 문체는 멋도 힘도 없을 것’이라 적고 있다. 산문가도 수시로 말에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문체를 괜한 수식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 우리 사이에서 음미해야 할 대목이다.

작가의 기능은 숨김없이 분명하게 말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 사르트르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며 그것은 폭력의 원천이라고 단언한다. 머리를 많이 쓰는 것이 치매 예방책이란 속설을 반증이라도 하듯 치매증 끝에 작고한 영국 작가 아이리스 머독이 영어로 쓰여진 최초의 단행본 사르트르론에서 그를 ‘낭만적 합리주의자’라고 정의한 것은 이 점에서도 타당하다.

▼문학의 모든 쟁점 해부▼

편의상 책 속에 피력된 언어관의 일단만을 살펴 보았으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는 독자와 작품, 작가와 체제와의 관계 등을 비롯해서 문학에 관련된 모든 쟁점들이 도전적, 논쟁적으로 해부되어 있다. 또 거칠 것 없는 단호한 목소리로 저자의 주장들이 개진되어 있다. 앞뒤 모순되는 발언도 보이고 난해한 대목도 수두룩하다. 그러기 때문에 이 책은 더욱 읽을만한 매력과 가치가 있다.

오랜만에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읽는 것 같은 감개를 맛보았다. 정명환 교수가 한자도 소홀함이 없이 공들여 번역하고 소상한 주석을 붙인 우리말 번역본은 번역서가 있어야 할 방식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로서의 우리의 첫째 의무는 언어의 존엄성을 재확립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는 이 책은 젊은 문학도뿐 아니라 글쓰기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의 필독서라 할 것이다.

유종호(문학평론가·연세대 국문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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