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시튼의 동물기나 파브르의 곤충기를 글자 아닌 영상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때의 동물은 그저 인간의 ‘저 편’에 있는 신기한 객체에 불과했었다. 인간 속에 있는 수성(獸性)을 발견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동물 속에 있는 인성(人性)을 발견하기에는 주변에 똥개나 앵무새밖에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히 ‘동물의 천국’이라고 할 정도로 동물의 상한가 시대이다. 그래서인지 이 시대의 사회적 무의식을 대표하는 문화 상품도 동물이다. 모성애보다 부성애를 강조해야 하는 경제 대란이 ‘가시고기’의 생태와 맞물렸고, ‘엽기’의 잔혹성을 제거하기 위해 ‘토끼’의 발랄함이 동원되었다. 인기 있는 TV 오락프로그램에 연예인들이 나와 원숭이나 돼지를 자신의 아이처럼 기르고 개나 돌고래를 부하처럼 훈련시킨다. 그들 사이의 교감을 ‘인간적으로’ 강조함은 물론이다.
그럴 때는 인간보다 동물이 더 인간처럼 느껴진다. 진짜 인간처럼 대접받으니까. 애완동물의 천국이라는 뉴질랜드에서는 애완동물 호텔이 있어서 주인이 장기간 집을 비울 때 투숙을 시킨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법에 걸리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맡겨지는 애완 동물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도록 주인이 한 시간 정도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 노숙자보다 호강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토록 동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당연히 외롭기 때문이겠지만 동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심연을 비추는 거울인 문학에도 동물이 많이 등장한다.
가령 은희경의 소설 ‘아내의 상자’에서는 원제(原題)였던 ‘불임 파리’의 불모성과 비생산성을 통해 인간 소외를 다룬다. 그리고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에서는 수컷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인 암컷 비둘기가 그 사랑에 힘겨워 일찍 죽는다는 ‘도브(dove) 콤플렉스’를 통해 사랑의 폭력성을 문제삼는다.
이처럼 동물 속에 보이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근대의 문명은 ‘이성’을 내세워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 후 발전된 문명이 초래한 야만성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인간도 동물이다’라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했다.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킨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동물 선풍은 ‘동물도 인간이다’라고 바꿔 말한다. 드디어 동물이 인간으로까지 격상된 것이다.
하지만 동물도 인간이라는 이런 관점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여전히 인간을 동물보다 우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이 격상되어야 인간과 똑같아질 만큼. 지나친 애정과 상품적 가치에 의해 인간화된 요즘의 TV 속 동물은 여전히 인간의 ‘상대’가 아닌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동물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동물 비하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로 동물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더 이상 인간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랑이란 나와 닮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니까. 동물을 동물답게 대접해주는 것이 바로 동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된다. 리본이나 옷으로 인간처럼 치장해 주거나,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서 동물이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인간의 결핍된 부분을 동물 속에서 발견해서도 안될 것이다. 동물은 인간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메커니즘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러니 인간을 동물화하지도 말고, 동물을 인간화하지도 말자. 동물 같은 인간과 인간 같은 동물이 서로 같을 수는 없다. 동물 같은 인간도 인간이고 인간 같은 동물도 동물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인간과 동물의 영역이 해체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
동물의 비동물성은 그들이 인간의 집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진행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비인간성이 인간을 슬프게 하듯이 동물의 비동물성이 동물을 슬프게 할 것이다. 제발 동물을 동물처럼 대접하면서 사랑하자. 그것이 모욕이 안될 만큼 그들은 동물로서도 행복하다. 그러면 TV 속에서 더 이상 ‘동물들의 지옥’을 보지 않아도 될 텐데.
김 미 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