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미국인들은 한국을 처음 방문할 때 한국이 미국과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어로 조금만 천천히 말하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조금만 생활하고 나면 한국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우선 기본적으로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얼마예요?’ ‘화장실이 어디죠?’ 정도는 한국말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한국 화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슈퍼마켓이나 음식점에서 지갑 속의 현금을 모두 꺼내 보여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며 중간 중간에 ‘우회전’ ‘좌회전’ 등 간단한 방향을 알려줄 정도의 기본적인 지리도 알고 있어야 한다. 내 경험으로는 한국에서 살기 위한 기본적인 생존방법을 익히는 데만도 적어도 1년은 소요된다.
한국에 살면서 가장 이상했던 점은 택시를 탔을 때 미국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택시기사에게 목적지의 주소만 말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도착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동네 이름과 가까운 지하철역을 기사에게 말한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이면 부근의 유명하거나 특이한 장소를 다시 한 번 말해줘야 한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잊지 못할 낭패를 겪기도 했다.
당연히 한국생활 초기에는 호텔에서 회사를 오가는 지리밖에 알지 못했다. 서울지하철 강남역 근처의 회사 사무실을 매일 같은 길로 다니다 보니까 출퇴근에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몇 번 다니다보니 길가의 몇몇 건물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 여기에 자신감을 가진 것이 문제였다. 어느 날 택시기사에게 자신 있게 다른 노선에 있는 건물을 기준으로 방향을 정해줬는데 어느 순간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직원의 도움으로 간신히 출근할 수 있었다. 가까운 거리인 강남역과 서초역 부근에서 사무실을 찾지 못한 채 몇 시간 동안 헤매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3년여가 지난 지금은 서울 어디에도 자신 있게 돌아다닐 정도가 되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경험이 있다. 미국에서 축구는 한국에 비해 열기나 관심이 적다. 따라서 나의 축구 실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부임한 뒤 한 직원의 권유로 축구 동호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상한 것은 우리 팀 선수들이 항상 나를 주전으로 기용했다는 점이다. 다른 선수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사양하기도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반드시 내가 경기에 나가야 한다는 말뿐이었다. 사장이기 때문에 특별 배려를 했던 모양인데 미국인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축구의 룰과 경기 중 나의 역할에 대해 알게 될 즈음 시즌 마지막 게임에서 우연히 우리 팀 선수의 숫자를 세어보다 깜짝 놀랐다. 12명이었던 것이다. 즉시 주장에게 이 사실을 말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시즌 내내 우리 팀은 12명으로 게임을 치렀다는 것이다. 축구실력은 형편없는데 사장이니 경기에서 뺄 수는 없으니까 12명이 뛰어도 다른 팀이 용인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너무도 다른 문화에 솔직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우리 팀은 정상적으로 11명이 뛰고 있으니 나의 기량이 상당히(?) 발전한 모양이다.
아직도 한국어 실력은 축구실력보다 조금 나은 정도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은 매일매일 즐겁다. 승용차를 운전하기도 하고 쇼핑을 하며 한국어와 화폐 단위에 대한 이해를 시험해 보기도 한다. 한국인은 참으로 따뜻하고 다정다감하다. 마음에서 우러나 이방인을 도와주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1944년 미국에서 출생한 뒤 오하이오주의 데이턴대에서 생물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제비어대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74년까지 6년 동안 생물 및 물리 교사와 미식축구 코치를 했다. 이후 몇몇 회사에서 물류 취급 분야의 일을 맡아 이 분야에서 26년 동안 일해왔다. 1998년 6월 클라크그룹이 삼성중공업 지게차 부문을 인수해 설립한 클라크 머터리얼 아시아의 대표로 한국에 왔다. 클라크그룹의 총괄대표이기도 하다.
케빈 리어든(클라크 머터리얼 핸들링 아시아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