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울고 웃기는 영화 속의 여러 주인공들을 한자리에 모아본다면? 엉뚱하지만, 잠시나마 여름철 더위를 잊게 해주는 재미있는 상상이다. 영화 칼럼니스트 이명석씨가 ‘신라의 달밤’ ‘간장선생’ ‘미이라2’ ‘진주만’ 등 올 여름 개봉한 4편의 영화를 뒤섞어 한 편의 콩트로 엮어냈다.》
“아아∼. 신라의 다아알 바암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천년 고도 경주의 밤을 깨우는 저 소리는 무엇이더냐? 10년 전의 모범생, 그러나 지금은 조폭(조직폭력배)인 이성재와 10년 전의 주먹짱, 그러나 지금은 교사인 차승원이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때 어디서 기차 화통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걸음을 멈춰라!”
“아이구 깜짝이야. 어떤 놈이야가 아니고, 간장 선생 아니십니까?”
소리지르던 차승원은 호랑이 만난 강아지처럼 설설 고개를 조아린다. “자네, 또 술에 곤드레가 되었어. 지난번에도 간땡이가 부어서 고생하더니….”
차승원 계속 술주정이다. “안 취했-섭-니다. 선상님. 이놈이 형님 대접을 안 해, 술 한수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간장 선생 혀를 끌끌 찬다. “어허, 혀 꼬부라진 것 좀 봐라.”
차승원은 막무가내. “아니라니까요. 보십쇼, 제 발음이 얼마나 똑바른지. 간장 의원 간장 선생은 짠 간장 선생인가, 안 짠 간장 선생인가. 보십쇼.”
그래도 덜 취한 이성재가 사과를 한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술도 깰 겸 야식이나 하러 가려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간장 선생 고개를 내두른다. “밤에 먹는 건 위에도 간에도 안 좋아.”
하지만 차승원, 간장 선생의 팔을 번쩍 들더니 막무가내로 끌고 간다. “갑시다. 혜수 만나러, 우리 애인 혜수 만나러.”
그들이 찾아간 곳은 혜수 분식. 말괄량이 김혜수가 라면을 팔고 있는 곳이다. 두 사람 다 혜수에게 된통 야단을 맞고, 라면 한 그릇씩을 입에 물고 있다. 간장 선생 또 설교. “자네들 정말 술도 끊고, 이런 라면도 끊어. 간을 지키는 게 자네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거야.”
이에 차승원 또 한 마디. “아 근데 말입니다, 선생님. 이놈의 간이 나빠져도 왜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까?” 이성재 발끈한다. “뭔 소리야? 내가 약값 보태달라고 한 적 있어?” “야 너 지역 건강 보험이지.” “그, 그렇지, 자영업이니까?” “짜샤, 우리 같은 직장 건강 보험 가입자 부담이 너네 두 배야. 우리 피땀 뽑아서 너네 건강 보살피게 됐냐고.”
혜수, 참다 못해 한소리 하려고 하는데, 반대쪽 테이블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아 좀 조용히 하쇼. 뉴스 좀 봐요. 큰일났어요.”
라면을 벌써 다섯 그릇째 먹고 있던 허름한 복장의 사내였다.
“아니 저게 어디다 대고 소리질이야.”
차승원이 맞고함을 지르며 그릇을 던지고, 사내는 TV 뉴스의 볼륨을 높인다.
“오늘 미국의 진주만 상공에….” 와장창 “일본 비행기가 날아와….” 와장창 “대규모 투하….” 와장창창. 사내는 갑자기 테이블에 벌떡 뛰어올라가 호소를 한다. “제발 제 말 좀 들어요. 지금 진주만에 일본 비행기가 들이닥쳤대요. 3차 대전이에요. 3차 대전. 저를 도와주세요. 이 나라를 구하러 가야 돼요.”
차승원, 코웃음을 친다. “뭔 잡소리야. 라면이나 곱게 먹고 갈 것이지.”
사내, 안 되겠다 싶던지 혜수의 금고를 집어서 냅다 도망간다. “아, 저놈 봐라. 도둑이야.”
혜수와 두 남자, 그리고 간장 선생까지 심야의 질주. ‘의사의 생명은 다리’라는 신조를 가진 간장 선생이 금고 도둑을 잡은 곳은 첨성대. 뒤이어 혜수와 두 남자가 달려왔다. 혜수, 당장에 도둑의 멱살을 잡는다.
“너, 라면 몇 그릇 팔면 그 돈이 나오는 줄 알아? 주부 습진 걸린 손으로 맞아 볼텨?” “제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간장 선생의 중재로 금고 도둑의 말을 듣기로 했다.
“저는 고고학자입니다. 20년 전부터 이 곳 경주 지역의 유물에 얽힌 비밀을 캐고 있었죠. 그리고 알아냈습니다. 이 곳 첨성대 밑에 감추어진 미라의 암호를 해독하면 이 나라를 지켜낼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차승원 역시 코웃음친다. “뻥까고 있네.” “정말입니다. 저를 따라와 보시면 알 겁니다.”
과연 고고학자의 뒤를 따라가니 첨성대의 지하로 통하는 비밀 계단이 있었다.
“신라의 과학 기술은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습니다. 이 첨성대는 단순한 천문 관측소가 아니라 동아시아 일대를 연결하는 군사 정보 통제소였죠. 당나라의 침입이 거세지자 승려와 화랑 중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좀 도와주십시오.”
모두 힘을 합쳐 커다란 돌문을 밀어젖혔다. 그러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역시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군요.” 그 때 혜수가 벽에 있는 손자국에 손을 맞췄다. “어머 딱 맞네.”
그 순간, 끼이익 하고 돌문이 열렸다. 넓은 공터가 나오고 이상야릇한 조각들이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찾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고고학자는 바닥 가운데 있는 돌로 된 관 뚜껑을 밀었다. “이 안에 있는 미라를 깨어나게 해서 3차 세계대전을 막아야 합니다.”
냉정한 이성재가 소리를 질렀다. “뭐야, 잠깐만! 정체도 모르는데 깨어나게 해서 어쩌자는 거야? 만약….”
그러나 이미 관 뚜껑은 열렸고 그 안엔 미라가 아니라 해골과 뼈들만 널려 있었다. “뭐야 이거 미라가 아니잖아.” 차승원이 짜증을 내며 관 뚜껑을 찼다. 좌절하며 바닥에 주저앉는 고고학자.
혜수, 고고학자가 측은해 보였는지 어깨를 감싸준다. “힘내세요. 모든 게 마음 먹은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때 고고학자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해골을 부여잡는다. “마음 먹은대로, 그래, 이 계획에 원효 대사가 참여했음에 분명해. 일체유심조라. 바로 이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면 그 사람이 이 나라를 구할 용사가 될 것이야. 누구야, 누가 마실 텐가? 누가 가장 용맹하고 순수한가?”
모두의 시선이 빙글빙글 돌더니 혜수에게로 향한다. 혜수, 과연 그 물을 마시고 위대한 용사 혜수 크로프트(Hyesu Croft)로 변신할 것인가?
다음날 새벽. 간장 선생은 국란을 알리기 위해 불국사의 종을 100번 쳤고, 고고학자와 두 남자는 설사로 탈진이 된 혜수를 데리고 동해로 향했다.
혜수에게 별 힘의 변화가 보이지 않자 고고학자는 문무왕릉에 가서 그녀의 부름을 기다리는 철인을 깨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아마도 에밀레종처럼 산 아이의 혼이 들어간 무쇠 인간일 것이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휴게소에서 이성재가 조간 신문을 사보게 되었는데, 신문의 1면을 뒤덮어야 할 일본의 진주만 침공 기사는 발견하지 못했고 해외 토픽난에 실린 작은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일본 경비행기, 진주만 해안에 피카추 인형 대량 투하. 캐릭터 회사의 충격 이벤트로 밝혀져….’
이명석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