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호령하던 황제의 퇴장은 쓸쓸했다.
가방을 둘러멘 어깨는 축 늘어졌고 코트를 빠져나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라커룸으로 들어간 그에게 말을 붙이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더욱 외로워 보였다.
3일 영국 윔블던의 올 잉글랜드 클럽에서 열린 윔블던테니스대회 남자단식 4회전. ‘잔디 코트의 제왕’ 피트 샘프러스(30·미국)는 19세의 신예 로저 페더러(스위스)와 3시간41분의 사투를 벌였으나 2-3(6-7, 7-5, 6-4, 6-7, 7-5)으로 패해 탈락했다.
샘프러스가 누구인가. 지난해 윔블던에서 생애 13번째 메이저 우승과 대회 통산 7번째 우승컵을 안았다. 올해에도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며 5연패 달성 여부에 온통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그의 윔블던 전성시대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느덧 유효기간이 다된 듯하다. 96년 이후 5년 만에 처음으로 쓰라린 패배를 맛보며 연승행진의 시계도 ‘31’에서 멈춰 섰다. 그가 윔블던 8강에 못 오른 것은 91년 이후 10년 만이며 비외른 보리와 대회 최다 연속우승 타이를 이루는 데도 실패했다.
페더러의 포어핸드 다운 더 라인이 매치포인트로 장식된 순간 샘프러스는 패배를 인정한듯 고개를 떨궜고 관중석에서는 탄식이 쏟아졌다. 샘프러스는 “알다시피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며 “오늘 나는 조금 모자랐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해 한물 간 게 아니냐는 우려를 들은 샘프러스는 유달리 강했던 윔블던에서도 힘없이 무너지며 황혼에 접어든 모습을 보였다.
샘프러스의 신화적인 서브를 대담한 리턴으로 맞선 페더러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부담 없이 침착한 경기운영으로 ‘대어’를 낚아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98년 윔블던 주니어 챔피언 출신으로 그 해 프로에 뛰어들어 99년에는 사상 최연소로 세계 10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경기가 끝난 뒤 코트에 무릎을 꿇고 환호한 페더러는 “우상인 샘프러스를 꺾어 너무 기쁘고 믿어지지 않는다”며 “내 생애 최고의 승리였다”고 흥분했다.
호주오픈에 이어 시즌 메이저 2승에 도전하는 안드레 아가시(미국)는 독일의 니콜라스 키퍼를 3-0(6-3, 7-5, 7-5)으로 눌렀다.
윔블던에서 3차례 결승에 올랐던 고란 이바니세비치(크로아티아)는 그레그 루세드스키(영국)에게 3-0(7-6, 6-4, 6-4)으로 이겨 8강에 합류했다. 강서브 대결로 화제를 뿌린 이날 이바니세비치는 루세드스키와의 상대전적 9승무패로 압도적 우위를 지켰다.
‘호주의 샛별’ 레이튼 휴이트(18)는 니콜라스 에스쿠드(프랑스)에게 2-3(6-4, 4-6, 6-4, 3-6, 4-6)으로 역전패, 8강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여자단식에서는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에 이어 메이저 3연승을 노리는 제니퍼 캐프리아티(미국)가 세레나 윌리엄스(미국)에게 2-1(6-7, 7-5, 6-3)로 역전승, 준결승에 먼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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