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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의 러프컷]여감독들이여, 화이팅!

입력 | 2001-07-05 18:35:00


여성감독으로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데뷔했던 이정향 감독이 ‘집으로…’라는 새 작품을 찍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산골에서 홀로 사는 말 못하는 외할머니와, 임시로 맡겨진 손자와의 얘기라는데, 감독의 말로는 ‘세상의 모든 외할머니에게’ 바치는 영화가 될 거란다. 외할머니라….

◆ 가슴 적시는 서정적 영상

외할머니에게 바쳐진 책으론 ‘할머니가 있는 풍경’이라는 게 있다. 네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저자 이혜리가 1912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 전쟁을 겪은 자기 외할머니의 개인사를 그린 책이다.

할머니는 빨개진 눈과 코를 훔치며 한탄하고 저주하고 기막혀하고 뉘우치며 얘기를 들려주고, 외손녀는 같이 울며 듣고 적고 해서 책을 써낸다. 내게 그건 일종의 굿으로 보였다. 하고 나면 그 어쩔 수 없었던 상처들과 죄의식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한 한숨을 토하고 코맹맹이 웃음을 다시 웃을 수 있는,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들을 용서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굿 말이다.

30대 중반의 여인이 4명의 어린 자식을 데리고 걸어서 한 겨울에 평양서 대동강과 임진강을 건너 서울로 간다.

다시 가축 운반용 열차보다 못한 고물 기차를 여러 날 타고 부산에 도착한다. 헤어진 가족을 찾는 쪽지로 도배가 된 부산 창진 교회. 영양실조의 수많은 피난민 남성들이 이제 막 도착한 그 다섯 명의 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두고 온 어머니와 처자에 대한 회한과 죄의식을 숨긴 공허한 슬픈 눈빛들. 그건 그 여인의 남편의 모습이자 우리 모두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저자와 같은 또래인 나로서는 내가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와 그런 식의 얘기를 나누는 걸 상상할 수 없다. 가부장적 사회의 남성에게는 어울리는 일이 아니니까. 우리 남성들은 마음 속의 감정들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도록 교육받아 왔고, 그러다 보니 정서적으로 어눌한 존재이기가 쉽다.

올해 충무로에서는 유난히 많은 여성감독들이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낸다.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정향의 ‘집으로…’는 각각 자신들의 두 번째 장편 작품이다.

◆ 충무로 우먼파워 거세져

신인 감독 작품으로는 정재은의 ‘고양이를 부탁해’, 이미연의 ‘버스 정류장’, 그리고 이수연의 ‘사인용 식탁’이 있다. 크고 화려하다기보다는 작고 소박한 작품들이다. 정서적으로 풍부한, 그래서 우리 남성들의 억압된 가슴 속까지 뻥뚫어 줄 작품을 기대해 본다. 건투를 빈다.

임상수 namuss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