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옛 소련에는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아’란 두 신문이 있었다. 전자는 공산당 기관지였고, 후자는 정부 기관지였으며 민간의 자유언론은 없었다. 러시아어로 ‘프라우다’는 진리요, ‘이즈베스티아’는 고지(告知)이다. 당시 소련 시민들은 언론에 대해 “소련에는 ‘진리’는 없고 국정홍보의 ‘고지’만 있다”고 야유했다.
대개 중앙권력이 비대해진 ‘큰 정부’에서는 자유언론이 위축돼 ‘진리언론’도 없어지고 ‘이즈베스티아’만이 있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신 있는 정부는 언론의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이 자신감을 잃었을 때 ‘이즈베스티아’만 있는 세상을 몽상하게 된다. 대개 정치가 정책실패를 거듭해서 속수무책이다 싶으면 국민 여론과 자유언론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싶은 충동에서 무리수가 나온다. 민주주의와 언론자유 등 신성불가침의 민주적 가치관을 걸림돌로 여기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것이 정치권력의 생리일지도 모른다. 이런 유혹이 있을 때 대(大)정치가는 역사의 거울 앞에 서서 그런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그동안 국민은 4대 국정개혁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채 개혁피곤증에 시달리던 차에 ‘언론개혁’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온 국민이 개혁 대상이 된 것 같은데 마침내 언론사까지 개혁당한다면 도대체 개혁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이 국세청이라면 과거 정권에서 배운 교본대로가 아닌가. 과연 세무관청이 언론개혁을 담당하기에 마땅한 개혁주체인가. 언론도 살고 납세관념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세무개혁부터 해야 하는 터에 언론개혁을 세무조사로 하는 데 더욱 당혹감을 느낀다. 국세청은 20여개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로 5056억원을 추징한다고 발표했다. 도대체 그동안 국세청은 뭘 하다가 무려 1조3000억원의 탈루를 이런 식으로 밝혀냈다며 세무사찰의 인상까지 주면서 무리를 하는지 어리둥절하다.
세무당국은 가슴에 손을 얹고 다른 기업들과 견주어 조세행정의 형평에 문제가 없는지, 그 결과가 자유언론의 존립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역사감각을 견지했는지 차분히 반성해야 한다. 자유언론은 수난을 겪어도 ‘불사조’처럼 다시 산다.
우리 언론은 일제 수난기와 군부독재의 가시밭길을 헤치고 민족언론, 반독재 자유언론의 길을 걸으며 ‘권력은 짧고 언론은 길다’는 역사적 진실을 입증해 왔다. 1920년 이래 동아일보는 일제강권의 거듭된 정간 폐간의 수난 속에서도 한글과 민족혼을 보전해왔다. 1940년 패망 직전 일제가 민족언론을 식민당국의 기관지로 전락시키려는 책동에 저항하다 장래의 부활을 기약하며 폐간되기도 했다. 마침내 일제는 무너졌고 민족언론은 다시 자유언론으로 되살아났다.
광복 후 동아일보는 4·19혁명을 일구어내며 반독재 민주언론의 몫을 다했고 유신정권 때의 광고탄압에도 백지광고로 분투하여 온 국민의 성원을 얻었다. 당시 언론사들은 자유언론의 실천에서 편집진과 경영진간의 자중지란 유도에 다시는 말려들어서는 안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지난 50년간 언론의 역사를 통해 자유언론은 권력에 영합하지 아니하고 국민의 편에 서서 정론을 펴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우쳤다. 오히려 국민과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면 그 신문의 장래는 없다.
자유언론은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대한민국의 우월을 이룩해낸 긍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북한에서 망명한 고위층 인사는 한국 언론이 정부 정책을 과감하게 비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50년간 동안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보도하고 비판해 왔는데 북한에는 한마디 정치비판도 못하는 신문만 있기 때문이다. ‘이즈베스티아’만 있으면 정치가 편해지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꿈은 그 권력이 무능해지고 부패를 자초하는 반민주적 악몽이다.
아널드 토인비는 정치지도력에 대해서 도전에 대한 응전에 성공한 창조적 소수자도 다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낡은 방식만 되풀이하면 어느덧 지배적 소수자가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이런 것은 무리수의 정치이다. 자유언론이 다시 활기를 찾으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궁벽스러운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모두가 정치적 흑심을 버리고 공명정대한 마음으로 돌아갈 때 이번 ‘언론풍파’를 풀어가는 정도가 열릴 것이다.